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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Mar 01. 2022

여로에서 (17)

내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다


열시 반쯤에 일어났다. 열은 잦아들었지만 자글자글한 근육통은 여전했다. 상체를 일으켜 침대 뚜껑에 몸을 기대 눕혔다. 어떤 자세로 어떻게 앉아도 몸이 편치 않았다. 쉬는  쉬는  같지가 않다. 힘들더라도 일어나서 뭔가 해야지. 뭔가 하려면 입맛이 없어도  먹어야지. 인간을 작동시키는  번거로운 일이다.



전날 사온 베이컨, 계란, 방울토마토를 구워서 우유와 함께 먹었다. 집에 있을 때도 심심찮게 해먹었던 아침식사다. 맛으로 먹는다기보단 살아야하니까, 영양을 보충해 조금이라도 몸에 힘을 보태야 하니까 먹었던  같다.

밥먹은 흔적을 대충 치워놓고 책상앞에 앉았다. 오늘이 일요일이니까 내일은 월요일이고, 새로 영업일이 시작되는만큼 편집자에게서도 연락이  것이었다. 다행히도 어제는 작업을 많이 해놓고 잤다. 만약 오늘도 어제만큼아니지, 어제보다 조금만    있다면, 실질적으로 초고를 마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는 끝이 보이면 무리할 정도로 스퍼트를 내는 편이다. 이런 작업 스타일과 맞물려 마감 후반에 압박감이 축적돼가는 점은 좋지 않지만. 내가 믿는 구석은 그렇게 나온 결과물들이 결코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일일이 쓰긴 좀 귀찮게 느껴졌을 표현들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괜히 줄줄 늘리다 힘이 빠졌을 부분이 한두문장으로 깔끔하게 매듭지어지기도 한다. 복잡한 판단이 단순하게 풀리고, 보다 본질적인 요소들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생긴다. 축구선수로 치면 전반에는 ‘어떻게 컨셉을 잡고 해야할지’ 생각하느라 볼터치도 제대로 못하던 놈이, 후반 끝무렵에 몸이 풀려서 뜬금없이 중거리 때리고 턴까지 돌리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알기로 이런 타입의 선수들은 몇 경기에서 반짝 스타가 될 수는 있어도, 마지막에 보면 일류라고 할 수 없는 커리어를 남기고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나는 이삼류조차 아니어도 좋으니 먹고 사는데만 지장이 없으면 좋겠다. 그저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네가 떠난 뒤로는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

 이 년간 함께 살았던 당시, 나는 동거하는 커플들이 으레하던 착각을 하며 살았다. ‘우리’는 이미 가족이 됐다는 착각. 매일 둘이서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새로 나온 영화를 보고, 여행을 떠나고, 같은 집으로 돌아와서 함께 잠들었다. 나는 ‘언제 결혼할까’ 라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결혼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어떻게 앞으로 향할지, 확신할 수 있는 미래를 쟁취할 수 있을지만 고민하면 될 것 같았다.  

나만 잘할 수 있으면, 뭔가 해낼 수 있으면 된다…

진짜 가족이 될 수 있는 자격. 떳떳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창업실패 이후 끊었던 약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항우울제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상태가 되거나 충동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해줬다. 메틸페니데이트는 여러 곳에 한눈파는 습관을 죽이고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게끔 해줬다…

 —이 약만 먹으면 나는 진취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인간이 됐다. 무기력감을 느낄 때조차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보내야하는 인간. 매일같이 어떤 식으로든 발전한 모습을 보여야하는 인간.

심장이 미칠듯이 뛰었고, 식욕과 성욕과 수면욕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난 그저 내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밥을 먹었다. 성기능이 멀쩡하다는 점을 증명하기위해 관계나 자위를 하고, 하루하루의 효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고 잠에 들었다. 그럼에도 도달되지 않는 일상에는 어떤 착오가 존재했는가?

몇 년 간 이어진 투약생활 끝에, 난 내게 최소 두 개 이상의 인격이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목적없는 일들로부터 인격이 쪼개지기 시작했다.  넋두리나 다름없는 친구들과의 대화에 짜증이 났다.    뿐인 데이트와 여행을 조르는 여자친구가 거추장스러웠다. 나는 항상 글을 써야했다. 뭔가 대단한 글을 써서 위대한 작가로 인정받거나,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를 내서 유망한 신랑감으로 거듭나길 원했다. 글을  거리가 전혀 없을 때에도, 그럴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을 때에도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 뜯었다.



한편 해가 지고 약기운이 다 떨어지면 나는 극도로 짜증스럽거나 상냥한 인간이 됐다. 주변사람들은 내 그런 양면성에 당황하며 힘들어했다. 내가 하고싶은 말이 있을 때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저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뒤에서 흉보여지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억지로 웃고 괜한 농담을 흘리고 던졌다.

 나는 외로워졌다. 누가 옆에 있을 때에도,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뭔가 더 해내지 못하면 모두가 내 곁을 떠나고 말거라는 공포를 느꼈다. 마침내 ‘가족이었고’ ‘가족이 될 줄 알았던’ 사람들이 원래 속해있던 차원으로 돌아가버렸을 때. 스스로를 변호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는 외로우며 고독한, 안목없는 세상과 투쟁하는 작가가 되어야 했다. 가장 독립적인 개체로 행세해야 했다. 이 사실은 실로 역설적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믿고 의지할 대상을 필요로 했는데도.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네가 정말 우습다. 매일 아침 먹는 몇 알의 약으로 다른 사람이 된 것마냥 굴더니. 또렷하고 흔들림없는 정신으로, 네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방식으로 해낼 것처럼 생각하더니.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많은 단어를 쓰고 있는 건 네가 아닌 나구나. 가장 효율적인 공간이라고 자부하던 집에서는, 매일매일 약을 먹고도 지지부진했던 문장들인데.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나누는 타지에 와서, 느려터진 인터넷과 낡은 노트북으로 이 모든 글을 쓰고 있잖아. 열병이 도져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지금, 가장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튀어나와 못다한 숙제를 처리해주고 있구나. 주체되지 않는,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예측도 없고 대책도 없는 내가 말이야….


마감 직전 약을 먹지 않고 보냈던 하루는 이날 뿐이었다. 진통제와 섞여 무슨 부작용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 판단이 유효했는지 밤이 됐을 때에는 열도 통증도 크게 가라앉아서, 당장은 걷거나 뛰는데 지장이 없는 정도로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

 상황은 더없이 특수했다. 특수한 장소에서 특수한 병에 걸렸고, 글쓰기 말고는 다른 할 일도 없는 특수한 궁지에 몰려 있었다. 어쨌든 나는 밤늦게까지 계속 글을 썼고, 체크아웃을 열두시간 앞둔 한밤중에 목표한 분량을 마감할 수 있었다.

분량과는 별개로 나는   내가  글이 ‘내가   있다고 생각한 것보다  괜찮게 쓰였다 점에 크게 놀랐다. 분량적인 측면에서는 출판사의 생각과  간극이 있기 때문에, 많이  내용이 잘리거나 부족한 내용을 보완해달라는 요청이 있을지 모르지만일단은 끝났다. 고통도 마감도 일시적인 소강상태에 다다랐다. 체크아웃은 다음날 오전 열한시였다.




나는 다른 숙소를 알아볼까 생각하다가, 이제 그만 나탈리아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그녀에게 ‘먼젓번에 말했던 아파트에 묵을 수 있을까요? 증상이 많이 괜찮아졌고. 다음 검사를 받을 때까지 머무를 곳이 필요해서요’ 라고 문자를 보냈다.

 나탈리아는 흔쾌히 수락했다. 답장을 보내 아파트 주소를 알려주고, 다음날 체크아웃을 하는대로 찾아가면 라파엘이 나와 키를 줄거라고 했다.

 ‘검사가 끝나도 원하는만큼 계속 있어도 돼요. 돈은 필요없으니까 편하게 사용하도록 해요. 우리는 당신을 묵게 하는데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으니까요.’


 늦은 밤. 나는 냉장고에 못다먹은 식재료를 털어 간단한 저녁식사를 차려 먹었다. 설거지감이 많아졌는데 ‘체크아웃할 때 어디까지 치워야하는지’가 좀 애매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알렉세이한테 물어봐야겠네… 안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일단은 이런저런 쓰레기들만 한데모아 버리기 좋게 놔뒀다. 러시아는 분리수거에 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 아파트 단지에 있는 대형쓰레기통도 한 군데 뿐이고. 자원이 많아서 재활용할 필요를 못 느끼는 걸까. 한국에서 오래 살아 분리수거에 익숙해진 내겐 마냥 편하지도 않았다. 뭔가 찝찝하다.

 몸상태를 점검할겸 팔굽혀펴기를 몇 번 해봤다. 힘들긴해도 아예 못할 정도는 아니다. 아침이었다면 한 개도 못했을 텐데. 하루도 안 돼서 이렇게 상태가 좋아지다니 놀랍다. 그래도 무리는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날 쓴 글을 한두차례 돌려보다가 수면제를 반 알 먹었다. 창문을 열었지만 바람은 불지 않는다. 아랫층 어딘가에서 개짖는 소리가 두어번 들려오다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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