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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Mar 06. 2022

여로에서 (21)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간다


 수면제를 먹지못해 새벽 다섯시 반까지 잠을 설쳤다. 이젠 남은 분량이 얼마  되는 . 실시간 콜드브루처럼 짜먹는 인터넷 서핑. 모두 관두고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댔다. 누워서 이젠 꺼져있는 전등 속을 바라봤다. 꺼트린지  시간이 지났는데도 빛의 잔상 같은 것이 남아있다. 나는 그것이  달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른 아침 첫눈이 소복이 쌓인 맨홀뚜껑 같아 보이기도 한다는 생각을 하며 의식을 잃었다.



역시 열한시 반쯤 일어났다. 꿈속에서의 나는 왠지 한국에 있는 집 거실에 앉아서 선거 개표 방송을 보고 있었다. 숫자가 비등비등했던 것은 기억이 나지만 끝내 결과는 보지 못했다. 꿈속에서의 일이기는 해도 왠지 긴장이 돼서, 잠을 깰땐 이마에 땀이 맺혀있을 정도였다. 왜 이런 꿈을 꾼 것일까. 나는 선거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편도 아닌데.

사실 이건 조금 부끄러운 말일지 모르겠다. 요즘 들어서는 선거야말로 민주주의의 꽃이며, 이 작은 나라에서 일어나는 온갖 정치적 소재에 관심을 기울이고 제 나름의 신념을 관철하는 것이 민주시민의 의무라고들 하니까. 하지만 나는 대통령 선거 같이 큰 이벤트에는 관심이 없다. 아는 것도 많지 않다. 듣기 싫어도 들리는 이야기들이나 인터넷 기사 몇 개를 읽은 것이 전부다. 정치적 무관심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나더러 ‘당신은 신념도 의지도 없는 무기력한 대중이다’ 라고 말한다면 반박할 건덕지가 없다. 정말이지 무기력한 것이 사실이다.

내게 정치적인 문제 같은 것들은 너무도 멀게 느껴진다. 물론 그런 문제들이 실제로는 나의 삶과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으며, 당장에 정권이 바뀌거나 정부시책에 변화가 생기거나 했을 때는 내게도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쳐올 것이다.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 보다는, 사람들이 기껏해야 두세 부류의 인종으로 나뉘어 서로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습이 훨씬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선거의 결과로서 누가 당선이 되고 하는  두렵지 않다. 승자와 패자의 사상이 구분되는 , 거기에 뒤따라올 무조건적인 반목과 냉소가 두렵다. 지금도 인간은 이렇게나 슬픈데. 하루하루를 견디는 마음으로 살아야할만큼 외로운 존재인데. 다가올 사건들이라곤 하나같이 선을 긋고 구별하는 일들 뿐이다. 나는 그런 일에 대해 일련의 판단을 하는데 무진장 서투른 인간이다. 주체할  없을만큼의 슬픔을 느낄 , 나는 속으로 눈물을 닦느라 생각하기를 멈춰버린다.



공교롭게도 이 날 아침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기사도 읽었다. 나는 햇빛을 확인하고자 커튼을 치고, 베란다 문을 열어 공기에 화약냄새가 섞여있지는 않은지 확인해봤다. 놀라울 정도로 별다를 것 없는 공기. 그렇지만 놀랄 일도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는 이곳에서 수천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다. 내가 있는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에는 이따금씩 눈이 날리고, 새들이 다세대 주택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며 지저귀며, 작은 놀이터에서 핑크색 패딩을 입은 꼬마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한다. 그리고 나는 라파엘이 내준 낡은 아파트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격리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비극의 크기는 절대적일 수 있어도, 거리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나는 내게 주어진 의무며 권리 같은 단어들을 나열할 능력이 없다.


 아침부터 몸상태가 무척 좋았다. 이제는 목도 전혀 따갑지 않았고, 코도 원래 비염이 있던 정도를 빼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안 아픈 걸 넘어 최고조의 컨디션이다. 지금이라면 백이십킬로미터의 직구도 거뜬히 뿌릴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영사관 직원분에게 세 번째 PCR 검사를 예약해주실 수 있겠느냐고 정중히 부탁했다. 조금 이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어차피 검사 결과가 나오는데는 꼬박 하루가 걸린다. 미리 받아두어서 나쁜 거라면 매번 돈이 든다는 것인데… 세번째 검사비용까지를 다 합쳐도 한국에서 한 번 검사받는 비용보다는 저렴하니까, 그리 억울하다고까지 할 일은 아니다. 내일이면 이동이 자유로워질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가 또 좌절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직원분은 흔쾌히 다시 예약을 잡아주었다. 나는 몸을 씻고, 양치를 하고, 혹시나 비강에 남아있는 바이러스 찌꺼기인지 뭔지로 양성이 나오는 건 아닐까 싶어 코세척까지 했다. 코세척 용기와 식염수는 아파트 옆 건물에서 살 수 있었다.

 ‘나는  나았어. 이제 하나도 아프지 않아. 검사가 정확하게만 이루어진다면 음성이 나올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또 다시 같은 길을 지나, 예약시간에 맞춰 검사소로 향했다. 이제는 익숙한 ‘ABV’ 간판이 보였다. 한국말은 물론 영어도 못하는 간호사들조차 내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즈드라스부이쩨(안녕하세요)”

 “즈드라스—“

 하긴 같은 검사소에 pcr검사를 세 번씩이나, 그것도 외국인이 받으러 오는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이번에도 똑같은 간호사가 내 코에 들어갈 면봉을 준비했다.

 “트리에(벌써 세번 째에요)”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시늉을 했다. 간호사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 모든 게 잘 될거라는 듯, 장갑을 낀 손으로 어깨를 툭툭 치고는 마스크를 내려 보라는 손짓을 했다. 세 번째 검사가 끝났다. 결과는 늘 그랬듯, 내일 오후 두시에 나온다고 했지만 사실은 정오 무렵에 도착할 것이었다.

 돌아가는 길, 먼젓번처럼 맥도날드에 가는 건 좀 지루할 것 같아서, 몇 분 더 걸어 KFC 매장까지 가서 작은 치킨박스를 사왔다. 이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남은 건 내일까지 하기로 돼있는 원고 편집본 검토와, 일부 고쳐써야할 글들을 수정하는 것. 일을 하다가 잠들고, 다시 일어나서 일을 하다 보니 해가 저물고 밤이 돼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해야할 일이 더 남아있다. 이렇게나 갑갑한 상황속에서도, 나는 내 나름대로 의연하게 대처했다는 것을 적어두어야 한다. 검사소 앞 택시에서 막 내렸을 때, 비염으로 코가 훌쩍거리고 있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코에다 식염수통을 꽂아넣고 비강을 씻어냈다. 그밖에 내가 어쩔 수 없는 결과에 대해서는, 실망하지 않을 수야 없겠으나. 하다못해 불평만큼은 내일로 미뤄두기로 하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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