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컵라면은 좋다. 하지만 컵라면 세 개를 위해 가방에 빈자리를 만들어야하는 건 좋지 않다.
나는 찢어진 팬티를 버렸다. 땀에 쩔어 잔뜩 구겨진 셔츠도 버렸다. 고민 끝에 만원짜리 휴대용 드라이기도 버리기로 했다. 이건 라파엘의 아파트에 머물 때만 몇 번 썼지, 사실 헤어드라이기라는 건 웬만한 숙박업소—심지어 도미토리 호스텔에도—에 기본으로 마련돼있는 것이어서 굳이 휴대하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먼 길 가는데 헤어드라이기가 없으면 좀 불편할지도 몰라’ 라는 괜한 느낌 때문에 챙겼던 건데.
열 개나 챙겨왔지만 하나도 안 쓴 핫팩도 다 빼다 버렸다. 다 읽은 피츠제럴드의 책은 버리려다가 그냥 놔뒀다. 대신 책갈피를 버렸다. 이음쇠 부분이 헐렁해졌고, 쇠줄도 엉켜서 묶여버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최대한 짐을 비우고 출발했다. 컵라면을 다 먹고 나면 그만큼 자리가 텅 비겠지만. 러시아에 온지 세 주가 지난 지금은 잘 알고 있다. 챙겨오지 않아서 곤란한 것 보다는, 이미 꽉 차서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더 기분이 안 좋다.
이날 모스크바로 가는 마지막 열차는 오전 열시 삼십분에 출발하기로 돼 있었다. 그 뒷시간 열차는 전부 매진이거나, 여객이 아닌 화물 운송용으로 편성된 것이라 나는 탈 수 없었다. 미리 예약하려는 시도는 어젯밤부터 해보았지만, 염병할 모바일 카드 결제가 뒤져도 통과되지 않아서 현장발권에 모든 걸 걸어야 했다.
아홉시까지 짐정리를 끝낸 나는 숙소에서 주는 조식을 허겁지겁 먹었다. 카샤—오트밀로 만든 죽 같은 것—와 커피만 대충 먹고 곧바로 체크아웃했다. 하필이면 메뉴가 카샤라니. 티켓(카싸)와 발음이 비슷한 것이 조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 그런 건 전부 개같은 미신이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머리에 떠오르는 영상들…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처럼 발권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서, 겨우겨우 티켓을 사서 뛰어가지만.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점점 멀어져가는 모스크바행 열차의 뒤꽁무니 뿐이었다….
떠나야할 적기라고 생각했을 때. 불가항력으로 거기 머무르게 되는 것만큼 갑갑한 것이 없다. 나는 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미리 글을 썼다. ‘러시아어를 하지 못합니다’ 라는 말로 시작해서 열차번호와 출발시각, 도착지와 원하는 좌석 형태까지 미리 정리해 번역해뒀다. 나머지는 여권과 현금, ‘급해 죽겠으니 빨리 좀 해달라’는 다급한 표정연기로 어떻게든 돌파하기로 한다.
그렇게 해야한다. 왜냐면, 이제 간발의 차로 놓치는 데는 완전히 질려버렸다. 시간에 쫓기는 거야 인생이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어쩔 수 없다쳐도. 기왕지사 가까스로 올라타는 결말이 영화 같기도 하고 보람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오번 플랫폼. 표를 받아들자마자 직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냅다 뛰어건 끝에, 출발을 십분 남기고 모스크바행 횡단열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 장면이 딱히 영화같지는 않았다. 올라가기전에 여권도 검사하고, 객실 상황을 점검한 뒤 짐을 올려놓고… 뭐 누가 만든 영화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묘한 긴장감은 계속 되는데, 장면들 하나하나는 다소 초라하고 하찮기까지 한 걸 보면 스탠리 큐브릭이나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프랑스 감독이 연출한 것 같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약 삼천킬로미터를 이동하는 표값이 팔천백삼루블. 이 오십시간의 여정이 끝나면, 나는 공식적인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완주한 것이 된다. 내 힘으로 걸어서 횡단한 것도 아닌데 거기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느냐만… 사실 내가 한 거라곤 표를 사서 정해진 자리에 짐을 푼 다음 글을 쓰거나 읽으면서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때운 것밖에 없지 않은가. 애초에 그런 값싼 의미부여를 위해 열차에 탄 것도 아니다. 그럼 나는 대체 뭘 위해서 이 길고 긴 철길을 달리는가. 이 길의 끝에 대체 무엇이 있길래. 글쎄 아마도—스스로 다른 걸 찾지 못한다면—테트리스에 나오는 성당이나 입국심사 대기줄이겠지. 끝까지 다른 걸 찾지 못한다면.
객실에는 이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짧은 머리에 키가 크고 헬쑥한 남자였다. 이름은 세르게이이고, 나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까지 간다는 것 같았다. 영어가 안 통해 그 이상의 대화는 할 수 없었다.
나는 깊이 잠을 못 자서 피곤했다. 해가 밝았지만 쿠팡에서 몇천 원인가 주고 산 안대가 도움이 됐다. 세 시간 정도 깊게 잠들었는데, 자고 일어났을 때는 어째서인지 안대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있었다. 살 때 일회용이라는 말은 못 본 것 같은데. 무슨 기간제 캐시템이냐?
자고 일어나니 슬슬 배가 고팠다. 좀 이른 시간이기는 해도 ‘그걸 먹자’고 나는 결정했다.
오뚜기 김치면이라고 하면, 한국에서였다면 농심 김치사발면에 늘 밀리는 2인자 느낌이 강한 제품이지만, 도시락 같이 애매한 맛의 컵라면이 득세하고 있는 이곳 러시아에서는 제정시대 차르와 같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몇 주 만에 진짜 빨간 김치 테이스트—비록 라면에서이기는 하지만—를 맛볼 생각에, 나는 극한의 흥분상태에 도달했다. 따뜻한 물을 붓자 급격하게 풍겨나오는, 김치라면 특유의 풍미 때문에.
“크…크큭…” 하고 이상한 웃음소리마저 내고 말았다. 나 자신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조무래기 악당처럼 느껴졌지만. 마침 객실에 있던 세르게이도 날 이상한 눈초리로 힐끔 쳐다봤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김치맨에게는 김치면이 필요하다.
‘김치! 김치!! 으아아아!!’
나는 감동하고 말았다. 김치가 들어간 컵라면 정도로 그렇게 황홍해질 수 있을 줄이야. 나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자각이 이 순간에서만큼 확실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세르게이가 김치라면 냄새에 거부감을 느끼진 않을지 아주 잠깐동안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그러면 뭐 어떻단 말인가. 나는 김치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들이 더 불쌍하다.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김치에는 무려 항암효과까지 있단 말이다. 나트륨 과다로 동맥경화증에 걸리는 것 까진 막을 수 없는 것 같지만. 아무튼 좋다.
인구 백 만이 넘는 옴스크라는 도시에 십오 분쯤 정차했다. 외투를 하나 걸치고 열차 밖으로 나갔다. 날씨는 춥긴 했지만 몇 분도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바깥 바람을 쐬니 기분이 더 좋아졌다.
플랫폼 위에 마련돼있는 작은 상점에서 큰 사이즈 생수 한 통이랑 소시지 빵, 그리고 초코파이를 한 박스 샀다. 모두 합해 육백삼십루블이었다. 나는 ‘뭐지, 초코파이가 비싼가?’ 하고 칠백루블을 현금으로 건네줬는데… 거스름돈을 기다리고 있자 레몬 하나를 덜컥 얹어주는 것이다.
“에?”
“$@IY$O3$?”
상점 아주머니의 대답은, 심지어 러시아말조차 아닌 것처럼 들렸다. 나이가 있으신만큼 사투리를 쓰는 걸까. 나는 하는 수 없이 ‘나한테 레몬을 주다니 매우 당황했다’는 얼굴로 레몬을 다시 돌려줬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약간의 고민도 없이, 레몬을 도로 가져간 다음 옆에 있던 작은 사과 두 알을 봉투에 싸서 주는 것이었다.
나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사실상 말도 안 통하거니와 열차가 출발할 시간도 다 되어서 그냥 “다…(네…)”하고 대답한 다음 객차로 돌아왔다. 거스름돈 칠십루블 대신 사과를 받다니… 난 유년시절을 대구에서 보냈고 청송에도 가본적이 있지만, 이런 건 난생 처음있는 일이었다…
사과 자체는 맛있게 먹었다. 편의점에서 한 개씩 포장해서 파는, 퍼석퍼석하지만 잘 씹혀 뭉개지고 달큰한 세척사과 맛이었다.
그 사이 객실에는 청년 한 명이 들어와 맞은 편 아래침대에 짐을 풀고 있었다. 그 청년과 뭐라뭐라 대화를 주고 받는 걸 보니, 세르게이는 과묵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말이 안 통해서 대화하기 곤란했을 뿐이었던 것 같다. 어쩐지 자꾸만 멍하게 창밖을 보더라니. 외로워서 그랬던 거구나.
그대로 늦게까지 글을 쓰느라 노트북 배터리가 반이상 삐졌다. 콘센트는 아랫쪽 침대에 있지만 좌우로 좌석이 꽉 차있어서 쓸 수 없는 상황. 별 수 없이 복도로 나가서 공용콘센트에 충전기를 꽂아둔 다음 그 옆에 서서 책을 조금 읽었다. 피츠제럴드의 글은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표현이 보인다. 그러다 문득 배가 고파져서 열차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새우탕을 먹었다. 다 먹기는 했지만 김치면같은 임팩트는 없었다.
‘이건 역시 피시방에서 먹어야하는 가봐’ 라고 생각했다.
밤 열한시쯤해서 튜멘이라는 도시에 열차가 정차했다. 몇 분간 인터넷이 통하는 틈을 타 일지를 올려두었다. 이시각 한국은 새벽 세 시이기 때문에, 이럴 때 글을 올려두어도 곧바로 읽는 사람은 없겠지만. 요즘은 유치한 테제가 돼버렸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나는 이타적인 글을 믿지 않는다. 그저 조금이라도 덜 이기적이려 노력하는 글을 믿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