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눈이 뻑뻑한 오전이었다. 화장실에 가서 눈곱을 떼고 간단히 세수를 하고 돌아왔다. 4인 객실에는 나와 세르게이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창밖을 보고 이따금 설원에 둘러싸인 마을이 나오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다만 그 행동은 ‘진심으로 창밖 풍경에 감동을 받아서’라는 이유라기보단 다분히 의무적인 성격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어떤 경험이든 끝나갈 무렵이 되면. 그 순간을 의미있게 포장하고 기록해야한다는 강박이 생기니까.
크고 작은 주택가들 말고도 모스크바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단서가 있었다. 우선 역이 짧게짧게 정차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침대칸 대신 의자로 통일된 객차가 옆에 있는 철로를 지나가기도 했다. 광역권에 들어와있어서인지 열차가 달리는 도중에서도 인터넷이 심심찮게 터졌다.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지도상으로 보면 크렘린이 있는 도심부를 내핵으로 도시가 층층이 둘러싼 모양이다. 지름이 점점 넓어지는 원형 간선도로, 각기다른 궤도를 잇는 방사형 도로가 거미줄처럼 엮여있다. 나는 지도에서의 내 위치를 틈틈이 확인했다. 모스크바의 중심을 향해 꼬라박듯 돌진하는 횡단열차의 궤적도 그려보았다. 일만 킬로미터에 육박하는 기찻길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틀 전 내가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열차에 탔을 때. 그 때도 세르게이는 그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가 어디서 그 기차에 올라타 여행을 해왔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블라디보스토크나 중간 기착지인 이르쿠츠크 쯤에서 출발해, 그 어느 도시에서도 멈추지 않고 쭉 모스크바로 갔던 것일지 모른다. 나나 세르게이나 제법 긴 여행길 중에 있다는 점은 명확했다. 들뜬 기색이라곤 없이 멍한 표정. 차장과의 대화에서 보이는 여유. 태연함. 여정의 모든 순간이 동적일 순 없다는 듯 넌지시 회의적인 태도. 나는 모스크바에 내릴 준비를 하다말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냈다. 그리고 턱을 괸 채 지평선을 응시하고 있던 세르게이의 모습을 한 장 찍었다. ‘짤깍’하는 소리와 함께 필름 출력음이 들리자 세르게이가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렇게 나온 사진을 보지도 않고 세르게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선물이에요”
프레젠트, 라는 말에 세르게이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땡큐, 땡큐” 하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다. 나는 별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손사래를 치고 열차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세르게이가 그랬던 것처럼—창밖을 빤히 쳐다보다가, 손잡이 봉을 꽉 쥐고 스트레칭을 몇 번 했다. 객실에 돌아왔을 때 세르게이는 그새 옷을 다 챙겨 입은 채였다. 창밖의 풍경 대신 내가 준 사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진이 꽤 잘 나온 걸까. 나는 차마 그 장면까지는 찍을 수 없었다.
모스크바 야로슬라브스키 역 플랫폼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오전 열한시 십삼분이었다. 구천이백팔심팔 킬로미터에 달하는 철도 대장정이 이제 마무리 된 참이었는데… 열차에서 내리고 서서 사진을 찍고, 마지막역에 도착했다는 감회에 휩싸여 멍청하게 서 있는 사람은 나 혼자 같았다. 나와 함께 열차에 ‘들어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역을 빠져나가는 행렬에 섞여 사라졌다.
열차칸에 사람이 진짜 많이 있긴 했구나. 종착역이 되고보니 차량내에 있던 승객들 모두가 쏟아지듯 나와 대열에 합류했다. 실처럼 가느다란 물줄기가 하나둘 모여 새로운 강을 이루고, 또 다시 벽을 만나 무수한 갈래로 흩어지는 일련의 흐름…잠자코 벤치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자니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사람들은 이제사 도착했지만 멈출 생각이 없다. 잠깐 머무르거나 쉬어갈 겨를도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딘가 정체돼있다가 뭔지 모를 무언가를 놓쳐버리진 않을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지나 않을지. 그런 것들이 두려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토록 멀리 떠나와서, 일찍이 정해뒀던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도 새로운 목적지를 정해 떠나버린다. 집에서 역으로. 역에서 정류장으로, 정류장에서 도착역으로, 도착역에서 숙소로, 아늑한 곳으로. 침대에서 시끌벅적한 곳으로. 무드있는 음악과 커피냄새가 풍기는 곳으로. 고요하고 차분한 곳으로. 몸을 누이고 쉴 수 있는 곳에서 다시금 역으로.
수십 수백개의 캐리어 끄는 소리가 잦아들고 나서, 나는 그 뒤꽁무니를 따라 역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모스크바역은 다른 역들과 달리, 빠져나오는 길에는 역사에 들를 필요가 없게끔 만들어놓은 듯 했다. 그 길을 따라가자 지긋지긋한 레닌 동상이 한 번 더 나오고, 더 걸어가면 왕복 십차선쯤 돼보이는 큰 도로가 펼쳐져 의식이 아득해진다. <디지몬 어드벤처>의 주인공 태일이가 코로몬과 함께 현실세계로, 여의도 광장에 막 돌아왔을 때의 장면 같았다.
전화통화를 하는 사람. 아기를 달래는 사람. 여행객들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 구걸을 하는 사람. 부웅, 부우우웅하고 질주하는 자동차들. 끊이지 않는 경적과 다툼들. 모두 어디로든 벗어나려는 마음들. 그 사이에 서서 내가 부른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여행객임을 알아본 뒤 “택시?”하고 물어오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저씨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미안하지만, 역에서 잡은 택시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 마음아픈 사정을 내 눈빛에서 읽어냈는지, 아니면 그냥 ‘이건 뭔 또라이새끼야’라고 생각한 건지, 아저씨는 더 이상의 호객행위 없이 물러났다.
점심때가 가까운 오전이어선지 차가 몹시 막혔다. 생각해보니 러시아의 다른 도시에서는 서울만한 수준의 교통체증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는데, 인구 천만이 넘는 모스크바쯤 되니 확실히 길막힘의 밀도가 달랐다.도심부에 위치한 호텔까지 가는데 사십 분이 넘게 소요됐다. 걸어서 가도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는데. 물론 짐가방을 끌고 낑낑거리며 가는 것과 택시 뒷좌석에 앉아서 답답해하기만 하는 것에는 극명한 퀄리티의 차이가 있다. 나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그 현실은 때때로 편리하고, 대체로 갑갑하다.
모스크바의 심장을 가로지르는 강줄기. 그 너머로 적갈색 벽돌로 지어진 성곽이 늘어섰다. 나는 택시에서 짐을 내리는 도중에도 그 장관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크렘린이었다. 사람들이 성 바실리 대성당과 혼동하곤 하는 그 구조물… 나는 골목안에 있는 호텔로 들어갈 생각도 못했다. 택시가 떠난 뒤로도 몇 분이나 강 건너의 성벽을 쳐다봤다. 그 성은 여타 러시아의 건축물들보다 더 크고 아름다웠다. 파르스름한 날씨 아래 좌우로 광막하게 펼쳐진 모습이, 흡사 인간의 힘으로 지평선을 대체해보리라는 무모한 의지처럼 느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할 무렵 지나가던 차에 치일뻔했기 때문에, 이만 체크인을 하러 호텔 카운터로 걸어들어갔다.
카운터 직원은 그럭저럭 영어를 잘 하는 편이었다. 여권을 건네고 휴대폰번호를 알려준 다음 숙박계에 사인을 하는 것으로 체크인이 끝났다. 현금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카드로 계산을 ‘시도’나 해보기로 했는데 그대로 결제가 되어서 다행스러웠다. 숙박료는 이박삼일에 육천루블이었다.
‘들은대로야. 확실히 시베리아쪽 도시에 비하자면 물가가 비싸구만…’
그래도 이정도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따지자면 한국의 평범한 여관이나 모텔 수준이니까. 오히려 여태까지의 숙박요금이 너무 저렴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 호텔은 위치가 무척 좋았다. 골목을 나가면 곧장 크렘린이 보이는 강가도로로 이어졌고, 그곳에서 이십분 정도만 걸으면 붉은 광장이었다. ’피플레드스퀘어’라는 이름부터가 붉은광장과 가까운 숙박지라는 점을 어필하고 있었고. 나 역시 그런 장점 때문에 예약한 곳이었다. 다만 호텔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삼층까지밖에 없는 작은 규모였고, 그래서 엘리베이터도 짐 옮겨다 주는 사람도 없어 혼자 낑낑대며 가방을 끌고 올라가야 했다.
방은 좁지만 깔끔한 구조로 돼있었다. 멀티탭이 붙은 책상이 놓여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두꺼운 암막커튼에 넓은 창문이 한쪽 벽면 절반을 메웠다. 채광은 잘 되는 편이었으나, 창밖에 보이는 것이라곤 옆건물 벽면 뿐이었기 때문에 조금 실망했다. 하긴 예약가능한 방 중에서도 제일 저렴한 옵션을 골랐으니. 모스크바강과 크렘린이 내려다보이는 객실을 내줄리 없지만.
나는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침대에 풀썩 쓰러지듯 누웠다가 도로 일어났다. 어렵사리 모스크바까지 왔고, 이렇게나 날씨가 좋은데 객실 안에서 시간을 때운다는 건 말도 안 될 일이다. 우선은 가까운 붉은광장으로 가서, 크렘린과 바실리 대성당을 눈에 담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지금까지의 경험상, ‘너무 대놓고 관광지인 곳’ 주변에는 음식먹을만한 곳이 없거나 염병하게 비싸면서 맛대가리라곤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이건 러시아 뿐 아니라 어느 나라나 똑같은 것 같다— 붉은광장으로 향하기 전에 대충이라도 식사를 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침 호텔 지하 1층에는 ‘사쿠라 플레이스Sakura Place’라는 식당이 있었다. 이름도 그렇고 입구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주인공 같은 여자 캐릭터가 고객을 반기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일식당이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사실은 쌀국수부터 스시에 똠양꿍까지 아시아 요리를 다 취급하는 범아시아 음식점이다. 심지어 김치도 판다.
호텔 내부에 있다는 입지 때문인지 손님이 많진 않았다. 나는 메뉴 맨 위에 있는 만두국 비슷한 스프를 하나, 김치 ‘샐러드’를 하나씩 주문했는데. 놀랍게도 두 메뉴 모두에 고수풀이 듬뿍 들어가있는 상태로 나왔다. 김치에다가 고수를 넣어서 주다니… 나는 주인장을 불러 ‘이런 음식을 한국에서 내놓았으면 사형감이다. 헌법에도 그렇게 적혀있다’ 라고 일갈하려다가, 대충 빼고 먹어보니 ‘생각보다는 먹을만해서’ 그냥 먹었다. 나도 모스크바까지 와서 무슨, 얼마나 완벽한 김치를 바라고 주문을 했나. 심지어 김치도 아니고 김치 ‘샐러드’였다.
다만 만두국은 만두가 들어간 고수맛국으로, 고수를 정성스럽게 다지듯 썰어 넣어놓은 덕분에 도저히 다 집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도 그냥 먹었다. 물론 나는 고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상당히 싫어하는 편이다. 하지만 러시아에 와보니 이미 너무 많은 음식들에 고수가 침투해있었다. 이쯤되니 고수를 싫어하는 것도 너무 번거롭게 느껴져서, 그냥 ‘나는 고수를 꽤 좋아한다’고 스스로 세뇌하면서 먹어버릇하니 그냥저냥 잘 먹게 되었다. 과연 이것을 의지의 문제로 보아야할지, 아니면 ‘뭔가를 싫어할’ 의지의 터무니없는 결여로 보아야할지는 다소 모호하다. 알고 싶지도 않다.
대충 배를 채우고 몸이 따뜻해지자 걸음걸이에도 힘이 붙었다. 나는 붉은 광장을 향해 걸으면서 가까워져오는 그 건물… 많은 사람들이 ‘오 테트리스에 나오는 그 성이다’ ‘크렘린아니야? 그거 지은사람 눈 뽑혔다며ㄷㄷ’ 라고 반응하는 성 바실리 대성당Храм Василия Блаженного의 모습을 확인했다. 알고보면 크렘린도 아니고, 성도 아니라 대성당이지만, 아무튼 아름다운 건물의 대명사로 꼽힌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내 발걸음에 따라 점점 가까워져오는 대성당의 모습. 별안간 심장이 뛰고 귓등이 쿡쿡 쑤셨다. 나 역시 어린시절 낡아빠진 TV게임기로 테트리스를 하면서 그 건물을 봤고(존나 못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시드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도 ‘그냥 도시에 그런 거 하나 있으면 예뻐서’라는 이유로 지어놓곤 했던 불가사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유명한 건물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내가 느낀 감흥은 대충 그정도였다. 그것밖에 없었다. 모스크바의 공공건물 출입에는 QR코드가 필요하다는 모양이어서 그걸 얻기전까지는 내부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가까이가보니 다른 도시의 대성당들보다 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 중에는 고만고만한 사이즈라고 할 수 있었는데, 출입구 옆에는 뭘 수리하고 있는지 철제 컨테이너 박스같은 것이 설치돼있어서 왠지 김이 빠졌다.
성 바실리 대성당의 상징이라고 하면 형형색색의 지붕이지만, 그건 너무 유명해진 탓에 전세계에 모조품이 있었다. 한국의 어느 촌동네 놀이공원에만 가봐도 그 비슷한 지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가짜를 너무 많이 봐와서 진짜도 가짜처럼 보이다니. 그 성당 지붕을 직접 만져보더라도 플라스틱 이외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다른 관광객들처럼 사진이나 몇 장 찍고, 또 다른 관광객들의 표정이며 행동을 관찰하다가 붉은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크렘린이라는 말은 러시아 단어 크레믈Кремль에서 유래한 것으로, ‘요새’ 내지 ‘성’을 뜻하는 일반명사다. 말하자면 영어의 Castle, 혹은 불어에서의 샤토Chateau와 비슷한 말인데. 국가원수가 머무르는 크렘린궁이 너무 유명해지는 바람에 ‘크렘린’하면 ‘모스크바 크렘린’을 일컫는 말로 자리잡아버린 케이스라고 한다.
나는 가설 놀이공원이 치고 앉은 붉은광장을, 그 뒤에 있는 돔 백화점을 차례로 둘러봤다. 레닌의 사체가 보존돼있을 묘자리와 무명용사들의 무덤을 보고, 그런 풍경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의 표정을 보았다. 근심걱정 없이 웃고 떠드는 사람들. 그 모습을 석상같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털모자 군인들과, 짧은 굉음을 내며 상공을 가로질러 사라진 비행체의 궤적을 번갈아 확인했다. 그 일자모양 구름은 내가 묵고 있는 피플레드스퀘어 호텔, 그리고 우크라이나 키예프가 있는 남쪽으로 향해 머리를 틀고 있었다.
춥지 않은 날씨였지만 바람이 제법 불었다. 나는 몸이 으슬으슬해질 때까지 광장에 서서, 바실리 대성당이 아닌 크렘린 성벽을 올려다봤다. 아마도 저 빨간 성벽 너머에는 크렘린궁이,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전쟁 반대 시위를 벌이던 사람들이 잡혀들어갔고, 나처럼 무고하고 생각없는 관광객들밖에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애써 들뜬 관광객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어딘가 기념품을 살만한 곳이 없나 찾아보다가, 대체 무엇을 기념해야할지 알 수 없는 기분에 그냥 광장을 돌아나왔다.
모스크바의 주요 시설, 좀 유명하다는 관광지나 미술관에는 하나같이 백신접종이나 PCR 음성판정 여부를 확인하는 QR코드를 요구한다는 모양이었다. 나는 인터넷으로 그 정보를 확인했고, 따라서 그 QR코드라는 것을 얻기 위해 무슨 검사라도 할 요량으로 병원을 찾았다. 영사관 직원에게 한 번 더 예약을 부탁할까 싶었지만, 모스크바는 더 이상 그 직원의 관할지역도 아닌데다가 영사관보다 더 큰 대사관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쪽으로 연락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사관 직원은 조금 지친 목소리로 ‘메드시Medsi’라는 병원을 찾아가보라고 이야기했다. 외국인이 많이 다니는 프렌차이즈 병원인데, 거기서는 대충 영어가 통하니 가서 검사를 받고 싶다고 하면 도와주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모스크바 시내를 삼십분 걸어서 가장 가까운 메드시 지점을 찾아갔다. 하지만 접수처 직원이 영어를 하지 못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고—아마도 의사는 달랐으리라 생각되지만—결정적으로 가장 가까운 검사 일정이 모레나 되어야한다는 이야기 때문에 아무 수확없이 빠져나와야 했다.
‘젠장. 다른 도시에서는 미술관이든 박물관이든 QR코드 같은 거 신경 안썼는데. 모스크바는 대도시주제에 너무 팍팍하구만…’
어쩌면 그런 마인드로 돌아다녔기 때문에 코로나에 걸린 게 아닐까?
어쨌거나 나는 코로나에 걸렸다가 회복이 된 케이스다. 몸상태는 매우 좋고 마스크도 잘 쓰고 다닌다. 돌파감염이 된 시점에서는 별 쓸모없는 얘기가 되버렸지만, 한국에서 백신도 2차까지 맞았다. 다만 러시아에서는 자국백신인 ‘스푸트니크’를 제외한 다른 백신에 대해서는 접종내역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이상한 원칙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체 어떻게 해야하지? 마침 나는 모스크바에 있었고, 대사관이 도보로 이십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으므로 직접 찾아가 문의해보기로 했다. 누가뭐래도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대사관이 있으면 거기서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대사관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입구에 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있으려니 경비원처럼 보이는 러시아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충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저, 제가 코로나에 걸렸다가 돌아왔… 아무튼 그래서 QR코드가…” 라고 말하다가 말귀를 못알아먹는 것 같길래 “아 그냥 일이 있어요. 비자인지 뭔지 그거 때문일겁니다. 아무튼” 이라고 둘러댔다.
그러자 경비원이 대답하기를 “오늘은 대사관이 쉬는 날이에요. 내일 오세요” 라는 것이었다.
나는 황당해서 “어째서죠? 오늘은 화요일이고, 지금은 오후 네 시인데요?” 하고 물었다. “은행도 영업하는데 왜 대사관이 문을 닫아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한국인들한테는 중요한 날이라는 가봐요. 그래서 쉰대요”
경비원은 번역앱을 통해 그렇게 말했다. 뭐야, 한국인에게 중요한 날이라고…?
나는 황급히 휴대폰 잠금화면을 풀어 날짜를 확인했다. 그리고 육성으로 탄식했다. “흐으아아…”
‘말도 안 돼. 삼일절이라니. 러시아에 왔으면 러시아 공휴말만 쉬는 게 아니었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3월 1일’이라는 날짜에 완전히 무감각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한러 양국의 공휴일을 모두 챙겨서 쉬는 대사관 양반들의 편의에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뭐 그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이긴 한데. 왜 내가 가는 날에 맞춰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이 날은 여러모로 지치는 구석이 많은 하루였다. 아무리해도 택시가 잡히지 않아서 호텔까지 가는 길 절반을 걸어가야했고, 카페에 들어 커피를 마시면서 알아보니 ‘접종이나 음성 정보가 있어도 ‘Gosuslugi’라는 정부서비스에 등록돼있지 않으면 QR코드를 받을 수 없다. 외국인은 근처에 있는 은행 지점에서 등록할 수 있다’ 는 정보를 습득했다.
그래서 오후 여덟시까지 문을 연 은행을 찾아 갔지만, 거기서도 ‘여기 말고 MFC라는 관공서에 먼저 가셔야한다’는 말만 듣고 다시 나와야 했던 것이다.
나는 밤의 모스크바 길을 떠돌아다니면서 ‘러시아는 좆같아…’라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심신의 체력게이지가 밑바닥을 뚫고 마이너스 상태로 접어들었다. ‘날도 저물었고, 이젠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밥이나 먹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근처 식당을 찾다가 홍길동Hon Gil Don이라는 바를 찾았다.
‘바 이름이 홍길동이라니… 한국에서도 그렇게는 안 짓는데’ 라고 생각하며 들어갔더니, 아니나다를까 한국인은 없고 죄다 러시아인들 뿐이었다. 휴대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렵게나마 메뉴를 스스로 읽고 발음하며 익숙한 음식을 찾아보려 애썼다. 그러다가 거기 ‘김치찌개’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냉큼 주문해 먹었다.
러시아는 김치를 사랑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김치찌개는 진심이었다. 바에서 곁다리로 내놓는 그런 사이드 메뉴가 아니라, 신김치에 두부와 돼지고기를 적절하게 넣은 완전한 한국식 찌개를 내놓은 것이다. 나는 감동한 나머지 맥주를 세 잔이나 시켜먹고, 보드카까지 샷으로 마신 뒤에 비틀거리면서 숙소로 돌아갔다. 그 홍길동이라는 곳에서만 천루블이 넘는 현금을 써버렸다는 건 다음날이 돼서야 알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