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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성자 Apr 03. 2021

햇빛, 공간, 화분, 고양이

내 삶에 꼭 필요한 것들에 관하여

오후 4시다. 이런저런 일들을 마치고, 간단히 집 청소를 하고,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고, 따뜻한 둥굴레차를 한잔 타서 식탁에 앉았다. 뉘엿하고 해가 넘어가는 시간. 허리가 뻐근하여 앉은 채로 스트레칭을 한다. 

     

고개를 들어 베란다를 바라본다. 몇일 전 사다 놓은 꽃 화분들이 잘 자라고 있어 내심 뿌듯하다. 동시에,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에어컨 실외기 때문에 잠시 가슴이 답답해진다. 매일 수십 번씩 보는 실외기가 어쩐지 오늘은 내 생각을 물고 늘어졌다.      


답답하기 그지없다


나는 채광이 좋은 집을 선호한다, 아니 꼭 필요하다. 나에게 햇빛은 삶의 복지다. 형편이 늘 어려웠지만, 서울에서 살 때도 반지하나 북향, 창문이 막힌 집, 또는 창문을 열면 다른 집이 보이는 집은 절대 선택하지 않았다. 고시원도 꼭 창문이 있는 방으로. 하루에 단 몇 시간이라도 햇빛, 햇빛이 들어야 한다. 그래야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남원에 이사 온 지 2년이 되어간다. 혼자 월세 원룸에 살다가 갑작스레 결혼을 하고, 난생처음 대출을 받아서 전셋집에 살게 됐다. 20평 남짓의 소형빌라는 공간 효율성을 최대화한 구조다. 작은 베란다와 거실, 방 두 개, 욕실 하나. 


이런 촌구석에서 전세 신축빌라라니, 정말 운이 좋았다. 비록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이지만, 남향베란다 밖으로 탁 트인 주차장이 있어 괜찮았다. 집을 선택할 때 햇빛은 모든 걸 용서하게 해준다.     


햇빛은 나에게 소중한 모두에게 필요하다


새 집으로 이사하던 날, 성남에 사는 언니가 쓰던 30평형 스탠드형 에어컨을 얻어서 설치했다. 최근에 짓는 아파트는 실외기 전용공간을 따로 만든다는데, 이 작은 빌라는 얄짤 없이 유일한 채광 창구인 베란다가 실외기를 감당하게 되었다. 덕분에 베란다 창문 한가운데 떡 하니, 거의 절반이 실외기로 가려지는 탓에 매번 바깥 날씨를 제대로 볼라치면 고개를 이리저리, 화분에 볕을 좀 쪼이려면 창문을 요리조리 여닫는 게 일상이 됐다. 


애초에 설치기사님께 한쪽으로 설치해달라고 할 걸... 그때 짐을 푸느라 바빠서 챙기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 일 년에 두어 달밖에 틀지 않는 에어컨 때문에 내 삶의 휴식이 되어주는 햇빛 복지가 일년 내내 방해받고 있는 셈이다. 옥상으로 옮길까, 없앨까, 작은 걸로 바꿀까, 창문형에어컨이 있다는데, 별 생각을 다 해봤지만 결국 비용이 들어 포기했다. 좀 웃프다.                


우리 일상에서 실외기만 이런 상황을 만드는 건 아닐 것이다. 꼭 있어야 할 것 같고 없으면 불편할 것 같은데, 막상 들여놓고 나면 자리만 차지한 채 ‘공간적 여유’라는 다른 편안함을 해치는 가구나 가전제품이 누구나 하나쯤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옷걸이가 되어버린 운동기구 같은 거)


집은 그대로인데 가전제품은 점점 대형화, 전문화되어 간다. 냉장고는 양문형이 기본이고, 요새는 세탁기도 이불 빨래쯤은 거뜬히 해낸다. 집 평수에 맞는 공기청정기, 드럼세탁기와 건조기 세트는 이제 신혼살림 필수품이다. 노인들의 효도템이었던 안마의자는 인기 아이돌그룹이 광고를 할 정도로 전 세대의 인기템이 되었다. 


내가 사는 집에는 아직 침대와 장롱, 쇼파가 없는데, 집이 작아서 들여놓으면 분명 걸어다닐 틈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구입을 미루고 있다. 나는 공간의 여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우리 엄마와 살림왕인 언니는 계속 침대와 쇼파 등을 사라고 권한다. 살림집에 장롱이 없이 불편해서 어떻게 하냐고, 사서 써보면 편하다고. 물론 나도 안다, 그게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캣타워는 없지만 숨숨집을 직접 만들었다. 녀석이 좋아라한다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결혼 전에는 ‘미니멀라이프’에 꽂혀서 최소한의 살림을 영유하고자 했지만, 결혼 후 사실상 실패했다. 요즘 당근마켓에는 별별 중고물품들이 다 나오던데 미니멀한 삶을 위해 줄이기보다는 더 크고 좋은, 혹은 새로운 물건을 갖기 위해 쓰던 물건을 파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나도 집에 잘 쓰지 않아서 내놓고 싶은 물건들이 많은데, 사실 들여놓고 싶은 것들은 더 많다. 오븐렌지가 있다면 요리를 더 쉽게 할텐데, 더 큰 공기청정기가 있다면 작은방까지 소화가 될 텐데, 캣타워가 있다면 고양이가 더 즐거울 텐데, TV가 있다면 주말에 심심하지 않을 텐데, 비오는 날 건조기가 그렇게 편하다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집에는 도저히 그것들을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물론 돈도 없다). 그리고 없이도 아직 잘 살고 있다. 작은 집에 사는 다른 가족들은 도대체 그 살림들을 어떻게 채워놓고 사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만약 내가 또 집을 옮기게 된다면, 나는 더 큰 집으로 이사하진 않을 생각이다. 물론 넓을수록 공간 여유는 더 생기겠지만, 분명히 그 공간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불필요한 필요’가 솟아날 테니까. 이 정도의 공간과 이 정도의 살림이 나에게는 꼭 맞다. 


아, 마당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 사시사철 해가 잘 드는 보송보송한 마당과 작은 화단을 가질 수 있다면 내 일상과 사유가 얼마나 더 풍요로워질까?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집은 더 작아져도 좋다. 그리고 그런 집이라면 절대 실외기 같은 게 나의 소중한 햇빛을 가리는 일은 생기지 않겠지.     

 

고양이가 오후의 마지막 햇빛을 받으며 잔다. 세상에서 우리집 고양이가 제일 부럽다.


행복이 별거 있나.. 너희가 있어서 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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