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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첩과 만년필 Apr 19. 2023

책과 나 2

중학생과 쾌락독서

문유석 작가의 <쾌락독서>를 읽고 많이 공감했다. ‘세계명작’ 또는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에서 야한 장면을 만났을 때의 쾌감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나는 만화책을 읽을 때처럼 킥킥대며 소리를 내고 웃기도 했다. 내 중학교 시절의 쾌락독서에 대해 써보려 한다.



중학생 시절은 정말 힘이 넘쳐났던 시절이었다. 거리가 10미터 정도만 되어도 뛰어다녔다. 특히 금쪽같은 쉬는 시간엔 항상 뛰어다녔다. 복도 멀리서 친구가 보이면 손을 흔들었고 나를 쳐다보면 달려가 하이 파이브를 했고, 보고  있지 않으면 얼른 달려가 뒤에서 놀라게 하곤 했었다. 복도에 많은 학생들이 있었지만 그들 사이를 샤샤삭 빗겨 지나가며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도 느꼈었다. 그렇게 힘이 넘치던 중학생을 집중하게 만드는 책이 있었다.


‘빨간책’이었다.


남자중학교의 쉬는 시간에 교실을 돌아보면 애들 여럿이 까까머리를 한데 모으고 있던 곳이 각 교실마다 한 군데 정도는 있었다. 그 한가운데는 주로 빨간책이라 부르던 야한 잡지나 소설이 있었다. 이발소에 가면 어른들 눈치를 보면서 슬쩍 읽을 수 있었던 <선데이 서울>이나 <건강 다이제스트> 같은 경우에는 집중도가 낮았으나, 물 건너온 금발 미녀들이 야릇한 포즈를 취하고 있던 책을 둘러싸고는 다들 정말 숨이 멎은 것 같았다. 그런 무리가 발견되면 나도 빠지지 않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쉽게 수업 종이 울리면 다들 제 자리로 돌아가면서 다들 한 마디씩 했다.


“야! 그다음엔 나다!” “아냐! 내가 먼저야. 내가 전부터 찜해놨어!”


라며 서로 순번을 정했다. 부모님이 늦게 귀가하시는 애들은 그 책을 집에 가져가 호젓하게 혼자 즐길 수 있었으나, 어머니와 할머니가 집에 항상 계시고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장남인 나는 어떻게 해서든 학교에 있는 동안 그것들을 읽으려 애썼다. 부모님을 실망시키기 싫었다고 말하고 싶으나, 그냥 걸렸을 때 뒷감당이 두려운 소심한 중학생이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안방에 팔을 괴고 비스듬히 누웠다가 짙은 갈색 커버에 금장으로 글씨가 새겨진 10권짜리 하드커버 전집이 눈에 들어왔다. 한자로 <千一夜話(천일야화)>라고 쓰여 있었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가리키는 다른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알리바바나 신드바드이야기는 어느쯤에 나올까 생각하며 책을 훑어봤다.


‘이럴 수가….!’


알리바바가 나오는 곳을 찾아 페이지를 넘기는데 갑자기 요염한 자태로 앉아 있는 여자의 그림이 있는 게 아닌가!! 지금 다시 보면 아무것도 아닐 만화처럼 그려진 삽화였지만 중동 쪽의 옷을 아주 야하게 살짝 걸친 듯 입은 등장인물의 그림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보물을 찾은 사람처럼 책을 덮고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폈다. 주변은 바뀐 게 없는데 가족들과는 나눌 수 없는 기쁨이 내 안에 충만했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잘난 척을 했다.

Pixabay의 Mohamed Hassan

“너네들 아라비안 나이트가 원래는 얼마나 야한 책인 줄 아냐? 짜식들~!”


컬러풀한 미녀들을 집으로 데려오지는 못했지만 세헤라자데를 비롯한 여러 아름다운 여성들이 우리 집 책장에 기다리고 있었다. 책장 옆 의자에 앉아 1권씩 읽는데 너무 오래 읽으면 부모님이 궁금해하실 것 같아 30분 정도씩만 아껴 읽었다. 처음에는 발췌독을 하다가 나중에는 차근히 거의 모든 이야기를 읽었던 것 같다. 어떤 판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완역본 전집은 모험담뿐만 아니라 남녀상열지사까지 충실히(?) 번역해 사춘기 소년에게 너무 재미있는 책이었다.


천일야화를 10권까지 발췌독과 정독을 마친 후 그 위에 있던 더 두꺼운 전집에도 눈이 갔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국 고전문학전집 정도 되는 제목이었고 이전의 경험을 살려 ‘이 속에도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을지도 몰라’ 하는 마음으로 책들을 살폈다. 익숙한 춘향전, 홍길동전은 당연히 있었고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들도 많았다. 몇 권쯤 훑어보다 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변강쇠전>이 있었다. 최근에는 좀 더 다른 관점에서 조명되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속편까지 등장한 에로티시즘의 영화의 대명사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 내용을 읽어봤으나 중학생의 성지식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은유와 직유가 많아서 큰 감흥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기에는 충분했다.


“야~ 너희들 변강쇠가 원전이 있는 거 아냐? 난 그 원전을 읽었지!”


예상과는 다르게 친구들은 별 반응이 없었지만 난 계속 뻐기고 다녔다. 그 밖의 우리 고전 소설들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옛날 문체로 된 글에 별 재미를 못 붙였던 것 같다.


이 두  전집을 거치면서 나에게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짙은 갈색에 금장이 박힌 장식용 책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두꺼운 책들을 열어보았고 책이 겉모습과 관계없이 재미있을 수 있다고 여기게 됐다. 그 이전부터 꽂혀 있던 다른 전집에도 눈이 갔고 세로로 쓰인 책들에도 도전하게 되었다. 성경책과 신문을 빼고는 세로 쓰기가 사라지던 시대였지만 이래저래 훑어볼 마음이 생겼다.

사진: Unsplash의Cristina Gottardi

그 당시에도 이미 오래되어 종이가 갈색으로 변색된 책들 중 단편집은 좀 읽을 만했는데 그중 고골리의 <코>가 기억난다. 그 특이한 상상력에 감탄했고 추운데 살면 사람들이 좀 이상해지는가 보구나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자꾸 내 코를 만져보던 기억도 난다. (생각난 김에 다시 구해 읽어봐야겠다.)


중 3이 되어 비평준화 지역의 고입 시험을 준비하느라 3학년 때는 책을 많이 읽지 못했지만 불온한 의도로 시작한 중학교 2학년까지의 시간은 내 독서의 범위를 많이 넓혀주었다. 다행히 원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난 여유가 좀 생겼고 있어 보이는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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