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에 재미 붙인 초등학생(사실은 국민학생)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항상 책을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니고 시기에 따라 들쑥날쑥했다. 글자를 배우고 나서 책에 한참 빠져들었던 초등학생이었고, 야한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눈에 불을 켜고 보던 중학생이었으며, 공부가 하기 싫어 문학소년인척 했던 고등학생이었다. 그리고 20대에는 별로 책을 읽지 않다가 결혼하면서 책을 지금처럼 읽게 되었다. 시기별 내 독서의 기억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심한 감기로 밖에 못 나가게 되었다. 감기에는 몸을 꽁꽁 싸매 땀을 내고 열을 내리는 것이 최고라는 할머니의 엄한 방침에 그 놀기 좋은 겨울방학에 한 일주일쯤 이불속에만 누워 있었다. 멍하게 누워 천장을 보다가 벽 선반에 놓인 어린이용 전집에 눈이 갔다.
미국으로 이민 간 사촌형이 보던 하얀색 하드커버로 된 30권짜리 전집이었다. 딱따구리 시리즈라고 기억되는데 그 1권은 <그리스 신화>였다. 첫 번째 이야기인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부터 마지막 부분에 나온 트로이 전쟁 이야기까지 이름도 낯선 먼 나라의 여러 신들과 영웅들의 신기한 이야기들에 금방 빠져들었다. 그리스 신화로 시작한 이 전집은 여러 분야를 망라하고 있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로마제국 흥망사>(요즘에는 ‘쇠망사’라는 더 정확한 번역을 쓰지만) 같은 역사도 있었고, 방정환 선생의 <사랑의 선물> 같은 동화집도 있었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해가 되자 우리가 살던 초등학교 관사에 내 또래의 친구가 이사 왔다. 그 친구 집에는 100권짜리 전집이 있었다. 같이 놀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것도 좋았지만 친구집에서 한 권씩 빌려다 읽는 재미도 상당했다. 특히 친구 어머니께서 ‘너는 책을 참 좋아하는구나’라고 칭찬이라도 해주시면 더 으쓱해하며 일부러 어려워 보이는 책을 빌리기도 했었다. 그중 가장 재밌게 읽은 것은 그런 ‘어려운’
책이 아니었고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이었다. 그 만화 같은 상상력에 감탄하며 여러 번 읽었던 것 같다.
그 후 우리 부모님은 친구집에 있던 것과 비슷한 전집을 통신판매를 통해 구입하셨다. 이 두 전집들(아마도 일본의 어린이 책을 번역했을)에는 추리소설도 있었고 SF소설도 있었다. 아시모프나 하인라인의 소설을 어린이용으로 번역한 ‘공상과학소설’(예전에는 SF를 그렇게 불렀다.)들을 읽으며 외계인이나 미래가 궁금해졌고 자연스레 과학자가 꿈이라고 주변에 말하게 되었다.
아들의 꿈인 과학자를 응원하기 위해 아버지는 과학전집 100권을 사주셨다. 그 책들을 좁은 관사에 들이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손수 책장을 만드셨다. 버스를 타고 이웃한 읍소재지의 철물점에 가셔서 마룻바닥용 합판을 사다가 톱으로 자르시고 기억자 선반대를 받쳐 거의 모든 벽을 뺑둘러 책장을 만드셨다. 나와 동생은 손재주가 좋아 이것저것 만들어 내는 우리 아버지를 ’기술자‘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표지가 회색이었던 이 과학전집 역시 일본 도서의 번역판이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사진을 보면 우리나라의 풍경이 아닌 것을 그 당시의 나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아버지께는 그 책들을 다 읽은 것인 양 굴었지만, 이야기 (plot)가 없는 책에는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해 그중 많은 책들을 열어만 봤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문과생’의 기미가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은 내가 책 읽는 것도 좋아하셨지만 책 내용을 이야기할 때에도 잘 들어주셨다. 저녁 식사 후에 뒷정리를 하시느라 바쁘신 어머니 대신 주로 아버지께 읽은 책에 대해 말씀드렸다. 처음에는 재미있게 들으셨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면 앉은 그대로 벽에 기대 졸기도 하셨다.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한 직장인이 대부분 아는 내용의 이야기를 듣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끝까지 이야기를 다 들어주시진 못할 때가 많았지만 어린 나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들어주시던 부모님 덕에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물심양면의 지원 덕에 점점 더 많은 책을 읽게 되었고 결국 나는 ‘독서왕’이 됐다.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조사해 상을 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나는 우리 집과 친구집에 있던 전집 권수와 학교 도서관에서 읽은 책들을 더해 숫자를 말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400인지 500인지 숫자를 말했을 때 놀라시던 선생님의 표정에 좀 더 줄여 말할 걸 그랬나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어린이용 도서가 많아져 별것 아닌 숫자일 수도 있겠지만,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번만 다니는 산골마을의 학교에서 그 정도 읽은 학생은 없었고 나는 전 학년을 망라해 가장 책을 많이 읽은 독서왕이 되었다.
4, 5학년 동안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아이라는 자랑스러운 타이틀을 지녔었다(적어도 난 그랬다고 기억한다.). 그러다 5학년이 끝났을 때 아버지께서 원래 살던 도시 학교로 발령이 나셨고 나도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남은 초등학교 1년 동안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바빴는지 책에 관한 별다른 기억은 없다.
그러나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새로운 종류의 책과 가까워졌고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일들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