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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첩과 만년필 Oct 02. 2023

오래된 사진 다시 찍기

2018년 쏘 공원(Parc de Sceaux)에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처가에 갔는데 탁자 위에 놓인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장모님께 여쭤보니 오래전 프랑스 여행 때 파리 근교 쏘 공원 (Parc de Sceaux)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진 속 두 분의 밝은 표정이 평화로운 풍경에 너무나 잘 어울려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2018년도 여름, 우리 부부는 프랑스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사진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여행을 가기 전 처가에 들러 핸드폰으로 위의 사진을 찍고 사진 속 그 장소에 가서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으면 좋은 기념이 되리라 생각했다.


  8월 초 우리는 파리에 도착했다. 며칠 동안 루브르 박물관이나 퐁피두 센터  같은 주요 관광지를 돌아본 뒤 아내와 둘이서 미리 세웠던 계획을 실행하러 라 크르와 드 베르니역(La Croix de Berny)으로 향하는 교외선을 탔다. 작고 조용한 역에 내린 후 표지판을 따라 공원으로 향했다. 하늘을 향해 위로 쭉쭉 솟은 나무들이 짙은 그늘을 만들어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라 크르와 드 베르니(La Croix de Berny) 역. 파리 중심가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음.
역에서 공원으로 향하는 길. 멀리 보이는 엄마와 아이는 초행인 우리를 공원으로 안내해 주었다.
공원으로 향하는 오솔길은 시원하고 조용했다.

그 길을 지나고 나니 탁 트인 초원에 전문적인 솜씨로 다듬어진 나무들이 넓은 평지에 멋지게 펼쳐졌다. 넓은 장소였지만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멀리에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서서 찍으신 바로 그 계단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나와 아내는 그 계단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고 부모님이 서 계셨을 법한 곳을 찾아냈다. 우리도 같은 곳에서 사진을 남기겠다는 숙제를 먼저 끝마치고 싶었다. 하지만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어 일단 점심을 먼저 먹기로 했다. 숙소에서 싸 간 도시락을 풀밭에서 먹은 후 돗자리를 펴고 누웠다.

전날 먹던 바게트와 동네 마트에서 구입한 소시지로 만든 덮밥이 그 날의 점심이었다.

파란 여름 하늘을 보며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풍요로움을 느꼈다. 안타깝게도 그 풍요로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여름은 언론에서 유럽지역의 기록적인 폭염을 연일 보도하던 때였다. 정오가 지나면서 그늘도 더 이상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핸드폰 날씨앱을 확인해 보니 최고 기온이 36도가 넘을 거라고 했다. 느긋하게 숙제를 마치려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짐을 싸고 아까 그 계단 앞으로 향했다.


  그늘도 없고 뜨거운 햇살이 인정사정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선글라스 없이는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고 햇빛에 닿는 살갗이 따가울 정도였다. 일단 아내의 독사진을 찍으며 사진의 구도를 확인하고 땡볕 아래서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20~30분을 기다리니 남자 한 명이 별다른 짐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우리 근처를 지나가는 게 보였다. 수십 미터나 떨어진 길을 걷고 있던 그 사람을 불러 세우고 급하게 다가가며 사진을 찍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다행히도 승낙했다.


 그 사람 손에 카메라를 쥐어주고 아내가 있는 곳으로 얼른 다가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카메라를 향해 선 그 짧은 순간에 남자의 허술한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이 사진 찍다가 카메라를 들고 도망가면 어떡하지 하고 슬쩍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남자는 친절하게 두세 컷을 찍어줬고 카메라를 돌려받으며 난 여러 번 Merci와 Thank you를 외쳤다. 제법 그럴싸하게 사진을 찍어준 이름 모를 그 사람이 참 고맙다. 귀국해서 장인 장모님께 여행 이야기를 하며 이 사진을 보여드렸다. 대단한 무용담처럼 거창하게 사진 찍게 된 과정을 설명하던 나와는 대조적으로 장인어른은 담백한 미소로 싱긋 웃으시며 “좋네, 잘했어.”라고 말씀하셨다.     

 장인어른께서는 이 사진의 경우처럼 내가 흉내 내고 싶은 여러 가지 것들을 보여주셨다. 그 모습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하면 좋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주변에서 가끔 접하는 노인들처럼 당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으셨다. 내 생각엔 자랑하실 만한 것도 별로 내세우지 않으셨다. 멋진 노년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또 날마다 운동하시고, 날마다 외국어를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노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장인어른께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장인어른을 보면서 배운 것들을 하나 둘 기억하고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고 싶다. 그럴 때 아버님은 천국에서 “좋네. 잘했어”라고 말씀해 주실 것만 같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순 없지만 기억은 노력하면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다. 당신께서 내게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내가 보고 기억하는 좋은 것들을 오래된 액자 속의 사진처럼 자꾸 꺼내어 보고 그대로 흉내 내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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