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연기하는 삶의 배역에 대하여

카렐 차페크 <배우 벤다의 실종> 이대연 배우의 목소리로 듣고

by 생각의 여백

아침 공기를 가르듯 이어지는 이대연 배우의 건조한 낭독. 밀리의 서재로 들은 카렐 차페크의 단편 <배우 벤다의 실종>은 감정을 끌어올리기보다 사건을 차갑게 바라보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형사가 아닌 친구의 시선으로 밴다의 흔적을 따라가는 구조 덕분일까. 나는 이야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보다, 한 발짝 떨어진 관찰자의 자리에 머물게 되었다.

이 소설을 듣기 직전, 배우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떠올랐다. 배역에 완전히 스며드는 메소드 연기의 상징 같은 존재. 밴다 역시 그런 배우였다. 그는 거지라는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실제 거리로 나섰고, 그 몰입은 결국 살인자 코르벨에게 이용당한다. 불륜을 감추기 위해 그의 연기를 범죄의 도구로 삼은 코르벨의 행동은 분명한 악이다. 그러나 이야기를 따라가며 나는 반복해서 묻게 되었다. 정말 저렇게까지 몰입해야 했을까.

밴다는 끝까지 배역을 놓지 않는다. 그 모습은 한편으로 숭고하게 보인다. 죽는 순간까지 역할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그의 마지막은 하나의 커튼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그는 훌륭한 배우였지만, 일상이라는 무대에서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몰입은 예술을 완성시키지만, 삶을 유지하려면 결국 그 안에서 다시 나와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내내 그 경계가 궁금했다.

소설의 끝에서 친구 골드베르크가 살인자에게 던지는 말은 이야기의 온도를 완전히 바꿔 놓는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당신이 그 일을 잊도록 두지 않겠다.”



그 문장을 듣는 순간 나는 잠시 재생을 멈췄다. 기억과 양심이 만들어내는 형벌.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오래 지속되는 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은 끝났지만, 누군가의 삶에서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남았다.

그날 밤 퇴근 후, 거실 바닥에는 블록이 흩어져 있었다. 아이는 공룡이라며 블록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옆에 앉아 블록 하나를 맞춰 넣었다. 웃음소리와 장난감이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머릿속에는 골드베르크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배역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누군가는 그 모습을 지켜본다. 그 순간 나는 블록을 쌓는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기록하는 관찰자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모두 여러 배역을 오가며 살아간다. 조직 안에서의 나, 집으로 돌아온 아빠, 그리고 글을 쓰는 또 다른 자아. 밴다처럼 하나의 역할에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 삶은 강렬하지만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어떤 역할에도 깊이 들어가지 않는 삶 역시 공허할지 모른다. 결국 중요한 것은 몰입과 이탈의 리듬 아닐까. 배역 속으로 들어갈 줄도 알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줄도 아는 감각.

읽는 내내 나는 그가 조금은 안타까웠다. 그는 진짜 배우였지만, 어쩌면 삶이라는 무대에서는 스스로를 지켜낼 여백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블록을 내려놓고 아이를 바라보던 순간, 나는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배역을 얼마나 진심으로, 그리고 얼마나 균형 있게 살아가고 있는가.

1930년대 유럽 표현주의 화풍으로, 관찰자의 시선에서 배우 밴다의 몰입과 균열을 AI(GPT)가 시각화한 작품
작가의 이전글3, 7, 에이스, 그리고 스페이드 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