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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Jul 12. 2023

잉어와 안경

《새파란 돌봄》을 읽은 후


전래동화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 언니를 위해 샀던 전집에서 내가 읽었던 파트는 한국고전소설 파트였다. 색표지도 한국현대소설 파트에 비해 조금 더 옅은 아이보리색이었던 것만 기억에 남지만 나는 그 책을 닳고 닳고 닳을 때까지 읽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누구라도 읽으니 괜찮다고 생각하셨던 어머니는 생각보다 작은 글씨에 책을 눈 앞에 가까이 두고 읽는 수준에 와서야 내가 시력이 너무 떨어졌다는 것을 아셨다. 나이에 비해 너무 작은 글씨체였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학교가 가기 전에 시력검사판의 제일 큰 글씨가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투병생활을 했다. 내가 초등학생 때 발병한 어머니의 병은 잊을 만 하면 재발했고, 결국 내가 대학생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엄마가 죽고 장례를 다 치룬 다음날이었다. 남은 사람들 잘 살아보자고 이야기하며 오랜만에 아빠와 언니와 함께 거실에서 잠을 잤다. 안경은 부엌 쪽 식탁에 놓고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무리 찾아도 안경이 보이지 않았다. 온 가족이 나서서 내 안경을 찾았다. 그 당시 나는 안경이 없으면 왠만한 책을 10cm 앞에서 보지 않으면 볼 수 없을 정도의 시력을 가지고 있었다. 집 안 어디에도 안경은 없었다. 밭에서 무언가를 태우고 돌아온 할머니께 내 안경을 못 보았냐고 물어봤다.  “아이코, 그게 니 에미 안경인 줄 알고 태우고 돌아오는 길이다.” 내 안경은 아무리 빨리 나와도 1주일은 걸리는 제작기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1주일동안은 모든 집안 사람들이 나의 눈이 되어주었다. 장례식장에서 쓰러진 아빠를 대신에 하도 절을 하느라 무릎이 까져 있고, 앞도 보지 못하는 나는 그야말로 정말 돌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언니는 그런 나를 태우고 목욕탕에 데려가서 목욕도 시키고, 엄마 사망신고도 하러 다니고, 재산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앞이 안 보는 아이를 키우는 느낌인 것 같다며 웃던 언니는 안경을 찾자마자 폭탄같이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넘겨주었다.


 《새파란 돌봄》을 읽으며 왠지 모르지만 예전에 읽었던 전래동화들과 안경을 잃어버린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왜 동화들에선 항상 부모를 봉양했던 자식들이 행복하게만 끝났을까. 안경을 벗고서도 충분히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는데, 나는 왜 매번 언니에게 도움을 받았을까. 그리고 언니는 내가 이미 자취를 한 지가 꽤나 오래 되었는데도 그렇게 모든 것을 챙겨주려고 했을까. 그래서 오랜만에 그 책들을 함께 다시 찾아보았다.


생각보다 늙고 병든 가족을 돌보는 이야기가 많았다. 이야기는 대부분 가난한 집의 어린 자녀들이 부모의 병을 돌보는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이 이야기들이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어려운 형편에도 부모를 모시고 잘 살면 나중에 복이 온다는 그런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읽던 중에 한 가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동화가 있었다.


@Nika_Akin, 출처 Pixabay


아주 추운 겨울날 슬프게 우는 소년에게 길을 가던 한 노인이 사연을 묻는다. 소년은 아버지가 편찮으신데 어떤 약을 써도 소용이 없다며 노인에게 한탄을 한다. 노인은 잉어를 고아 드리면 나을거라고 말하고 소년은 언 강가로 나가서 매일 기도를 하며 고기를 잡는다. 매일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소년을 보며 잉어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묻는다. “넌 매일 무얼 중얼거리고 있니?” 소년은 잉어에게 위 사실을 말하고 그 말에 감복한 잉어는 자신을 잡아다 약으로 쓰라고 한다. 고마운 마음에 잉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소년에게 노인이 다시 찾아오고, 노인은 약을 주며 잉어와 함께 아버지에게 먹이라고 한다. 결국은 그렇게 약과 잉어를 고아 먹은 아버지가 병이 나아 행복하게 살았다는 전래동화적 엔딩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얼음 속의 잉어》다.


얼음 속의 잉어를 구하는 소년은 지금 지나가는 노인의 한 마디에도 해볼 수 있는 것을 해본다. 사실 소년은 이미 아버지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여태까지 쓸 수 있는 모든 약을 다 써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그를 슬퍼하며 운다. 이 모습에서 나는 그런 모습을 본 지나가던 노인의 이야기 하나에도 마음이 쓰일 정도로 소년은 아버지를 돌보고 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책에 나온 경훈이 떠올랐다. 스스로 먼저 할머니 돌보기를 ‘욕심’낸 청년. 소년은 기어이 매일매일 꽁꽁 언 강으로 향한다. 잉어를 잡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록 다른 누가 보면 쓸모 없는 일이라고 할 지라도 쓸모를 추구하는 모습에서 소년과 경훈의 모습은 닮아있었다.


늘 쓸모를 중시하던 경훈이지만 지금 가장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를 돌보는 일이 지닌 쓸모는 돈을 판단하는 쓸모를 한참 넘어서기 때문이다. 함께 살아가는 삶을 위한 쓸모가 경훈이 돌봄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다.  _ 조기현(2022), 『새파란 돌봄』, 서울:이매진, 133-134쪽.


지나가던 노인은 서럽게 울고 있는 소년에게 왜 우는지 묻고, 언 강물 속 잉어는 계속 중얼거리는 소년의 모습에 질문을 건넨다. 나는 이 질문에서 희준의 상담 선생님이 떠올랐다. 길을 가며 모르는 척 할 수도 있지만 소년이 우는 이유를 물어보는 노인은, 또 눈 앞에 낚싯대가 드리워져 있음에도 울면서 중얼거리는 소년의 말을 외면하지 않은 잉어는 소년의 상황을 그저 지나치지 않았다. 희준의 상담 선생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랬기에 상담 선생님에게서 담임 선생님으로, 또 반 아이들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희준은 마음이 열리고 에너지를 얻게 되었다.


“상담 선생님이 저를 따로 불렀어요. ‘너구나. 네가 굉장히 높은 점수가 나왔어.’ 그렇게 상담하면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니까 선생님도 ‘네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구나’ 하고 이해해주셨어요. 그때까지는 털어놓을 데가 없었어요. 내 마음속 도로의 모든 게 꽉 막혀 있었는데, 그게 풀렸어요." _ 위의 책, 71쪽.


소년의 말에 잉어는 자신을 잡아가라며 스스로 얼음 위로 올라온다. 노인은 소년이 가져온 잉어를 받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추운 겨울 잉어를 잡아온 마음에 탄복하여 새로운 약을 내어주고 잉어를 고아 아버지를 먹이라고 한다. 소년은 잉어와 노인의 케어로 인해 아버지를 살리고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누군가의 돌봄을 통해 가족 공동체가 다시 생긴 것이다. 동화는 끝을 말해주고 있지 않지만 서진이 떠올랐다. 기현은 그런 서진의 사업을 한 줄로 이렇게 말한다. “서진이 담당하는 교육 사업은 자기 혼자 걸어온 길을 많은 이들이 혼자 걷지 않게 하려고 함께 걷는 일처럼 보인다.” 소년이 혼자 걸어왔던 길을 잉어와 노인이 함께 걸어주었고, 그것을 통해 결국 회복한 아버지가 다시 소년의 돌봄 제공자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상상했다.


@SCAPIN, 출처 Pixabay

내 안경은 어쩌면 서로의 돌봄체계를 확인하는 확대경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엄마의 빈자리에 우리들이 혹여 너무 슬퍼하지 않을까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서 엄마 안경으로 착각한 내 안경을 태웠다. 엄마의 장례 내내 힘들어하며 쓰러져 있던 아빠는 내가 집 앞 마당에 널린 빨랫줄을 보지 못하고 걸려 뒤로 자빠지자 처음으로 소리를 내서 웃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이 집에 이사오고 한 번도 자리를 바꾼 적이 없었던 아빠의 담배와 재떨이가 TV 선반 위로 올라와 있었다. 언니는 떨어져 지낸 시간이 무색하리라 느낄 만큼 나를 곳곳에 데리고 다녔다. 새롭게 이런 카페가 생겼다고 데려가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여기서 끝난다고 알려줬다. 이쯤은 내가 할 수 있다고 해도 언니는 내 등을 밀어주었다. 안경이 도착하고 몇 가지 엄마의 사망처리를 마저 끝낸 후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올라탄 서울행 버스 안에서, 나는 처음 지역을 떠나 서울로 가던 버스를 탔을 때처럼 엉엉 울었다. 처음 지역을 떠나 서울행 버스를 탔을 때 터진 울음은 연결이 끊기는 것을 시원섭섭해하는 눈물이었다며 안경을 되찾고 다시 떠나던 버스 안에서 내가 흘린 눈물은 그 끊어진 연결감을 다시 채우는 울음에 더 가까웠다. 모든 것을 나 혼자 알아서 처리해야 하고 해결해야 하는, 성인으로서의 책임감과 두려움과 그동안의 고마움을 합한 것이 전자였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함께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슬픔을 보듬는, 그런 고마움을 합한 눈물이 후자였다.


이 돌봄이 돌고 돌아 나는 다시 이 지역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잉어와 안경을 떠올렸다. 잉어와 안경은 모두 우리가 잃어버렸던 돌봄의 ‘무언가’였다. 나는 그 ‘무언가’를 계속 찾고 있다.  “돌봄의 가치와 일의 가치를 같이 바꿔버릴” 그 무언가. 나에게는 그것이 안경이었고, 소년에게는 잉어였다. 그렇다면 당신에겐 무엇일까. 나는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어디선가 한 지점에서 만날 것만 같다. 그리고 그렇게 전래동화의 끝처럼, 모두의 이야기가 행복하게 살았다고 끝났으면 좋겠다. 아득히 보이지 않아도 나는 그렇게 희망한다.


지금 현실에서 이를 단숨에 성취하기 어려워 보일지라도, 가끔은 아득히 멀고 깊은 어둠을 헤엄치는 듯하더라도, 나는 우리가 계속해서 당연한 것을 요구할 것이라고 믿는다. 원래 그 삶은 우리 것이었으니 말이다. 기본소득과 페미니즘의 가치가 당연시되는 세계까지 나란히 달리며, 주변을 지나 바뀌는 풍경을 놓치지 않으면서, 서로의 허들을 치우고, 때로는 업고 뛰면서.  _한주연·박유형·백희원·성이름·김주온(2018),『기본소득 말하기 다시 기본소득 말하기』, 서울:만일,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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