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그녀는
첫 직장은 의정부였다. 나는 의정부를 한국지리와 역사 안에서나 배웠다. 2월에 채용이 되고 자취방을 구할 때 ‘음, 위도가 높아서 춥다고 하더니 정말 추웠어.’ 생각하며 방을 구했었다. 할머니는 내가 그곳에 직장을 잡았다고 하니 ‘군인들 많은 곳에서 무서워서 어떻게 지내니. 조심히 지내라.’라고 말했었다. 할머니에게 의정부는 미군부대가 가득한 예전의 기억만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도 허름했던 의정부역은 국내 2번째 규모의 큰 백화점이 들어섰고 나는 그 백화점이 들어섰을 때에 의정부에 살았다. 그리고 그 의정부는 나에게 좋은 기억들을 참 많이 남겨주었다. 지금도 가면 그때의 직장동료들과 학생들이 함께 맞이해 주는 곳이다. 고작 4년이라는 시간이지만 참 좋은 기억이 많은 곳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나의 고향이다. 나는 이곳이 지독히도 싫었다. 그렇지만 또 너무 좋았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여긴 좋은 기억과 싫은 기억이 혼재한 공간이었다. 지금 함께 사는 짝꿍에게 “왜 나한테 사귀자고 이야기를 안 해요?”라고 먼저 말했던 곳이고, 손에 한 줌 꽉 쥐었다가 흩뿌리면 반짝반짝 모래가 날리는 눈부신 바닷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명절에 여자들의 상을 따로 차리던 나의 친가가 있는 곳이고, 무엇보다도 엄마가 자신의 삶을 결국에는 포기했던 곳이기도 하다. 어디는 너무 좋은 기억으로만 가득했고, 또 어디는 가기만 해도 손발에 힘이 꽉 들어갈 정도로 이전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올라 고통스러운 공간이기도 하다. 의정부와 지금 이곳은 너무 다른 곳이었다. 너무나 삶의 기억이 많이 묻어 있는 곳, 그래서 나는 지독히도 이곳을 좋아했고, 또 싫어했다.
19살에 나는 이곳을 떠났고, 30살이 되어서야 이곳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곳을 떠날까, 여기에 남을까 고민하고 있다. 이곳에 있었던 친한 벗들은 거의 서울과 수도권으로 나와 함께 19살에 떠났었고, 이곳에 남아있는 나의 벗들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이곳에 24살에 왔다고 했다. 경기도에서 이 바다까지. 그리고 아빠와의 신혼집이자 밑으로 초등학교 동생까지 남아있던 엄마의 시가는 시내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산골이었다. 24살의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아빠를 따라 이 시골로 들어왔을까. 그 이후로도 아빠의 둘째 동생이 결혼하고, 언니를 26세에 낳을 때까지 할머니와 아빠의 동생들과 함께 지냈다. 그리고 아빠의 직장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녔고 나를 32살에 낳았다.
할머니는 내가 딸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바로 병원을 나갔다고 했다. 아빠는 많은 밤들에 조상님께 송구스럽다고 했다. 언니는 그렇게 울거나 싸우는 엄마아빠를 보면서 화를 냈다고 했다. 수많은 존재에 대한 부정이 있던 곳.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빠와 아빠의 가족과 큰딸밖에 없는 곳에서 32살의 파래 씨는 나를 잡고, 언니를 잡고, 또 자기 자신을 잡고 얼마나 울었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엄마로 바라보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울고 먹고 싸는 것밖에 없는 나를 붙들고 그 말 없는 반동인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끔은 생각한다. 타임머신이 나와서 엄마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면 절대, 저얼대 아빠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그리고 사랑에 빠지더라도 이곳에 오지는 말라고. 결국은 당신을 하나씩 하나씩 줄여나갈 공간이라고. 미래가 바뀌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결국은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엄마가 살아서는 이 말을 전해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외딴곳 32살의 파래 씨는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살아갔을까. 나는 그것이 가끔, 사실은 종종 궁금하다. 꿈 많고 소녀 같은 그이는 어떻게 결국은 삶을 포기하게 되었을까. 35세의 나는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을 종종 던지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