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가 잔뜩이다. 여름이면 구황작물이 집에 넘쳐난다. 아무래도 구황작물을 많이 키우는 동네에 살아서 그런가 보다. 감자를 어떻게 잘 먹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이전에 보았던 감자 뇨끼를 해 먹어보기로 생각했다.
뇨끼는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요리였다. 감자를 굽고, 구운 감자를 잘 으깼다. 포슬포슬 김이 나는 감자를 먹기도 하면서 반죽을 했다. 반죽을 물에 삶을 때에는 약간의 기대도 있었다. ‘나 요리왕비룡 아니야?’ 셰프가 된 느낌의 뿌듯함도 약간 있었다. 삶아지는 뇨끼들을 볼 때, 순간 엄마 생각이 낫다.
엄마는 항상 요리를 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내가 학교를 마치고 오면 엄마는 여러 가지 간식들을 직접 만들어줬다. 피자도, 쿠키도, 한식 간식인 매작과나 배숙까지도. 오늘의 간식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가는 하굣길이 너무 신났다. 서울에 살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올 때마다 무얼 해줄까? 묻는 엄마의 목소리리가 약간은 들떠있었다. 나만큼 엄마도 신난 걸까, 생각하며 즐겁게 엄마에게 먹고 싶은 것을 말했다.
뇨끼를 만들며, 엄마가 왜 그렇게 요리를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감자를 다듬고, 양파를 채 썰고, 손으로 주물주물 반죽을 만드는 건 생각보다 많은 감정이 사라지는 일이다. 그리고 두 가지의 감정만 남았다. 온전하게 집중한 나의 마음과 이걸 먹는 사람이 함께 즐겨주었으면 하는 마음. 엄마는 그렇게 요리를 했나 보다.
이상하게도 나의 뇨끼는 삶으면서 약간 흐트러졌다. 그렇지만 다행히 함께 먹는 이의 식성과 시판 소스의 맛으로 어느 정도 없앨 수 있었다. 이걸 먹어주는 이의 얼굴에 엄마가 나를 쳐다보며 요리하는 모습이 겹쳐졌다.
엄마의 요리는 슬픈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나 보다. 마음이 부산할 때 그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시간은 손으로 양파를 썰고, 감자를 으깨고, 반죽을 빚고, 뇨끼를 끓이면서 기다리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지나서,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약간의 행복을 느끼는 것. 엄마가 마음을 달래는 그 시간들은 아마 내가 뇨끼를 만드는 시간과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엄마, 나 이렇게 잘 만들고 먹고살고 있어. 이 정도면 적절히 행복한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