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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May 21. 2023

기억을 선택할 수 있다면

이해하지 않아도 축제인 날들을 기다리며


가까운 이가 나에게 물었다. "일정을 이렇게 색색깔로 구별해 놓은 이유가 뭐야?" 익숙한 질문이라서 심드렁하게 "내가 기억을 잘 못하거든." 대답하였다. 기억을 잃어버릴까봐 개인적인 일, 업무, 공동체의 일, 생일과 기념일 등을 각각 다른 색깔로 정리해 놓은 다이어리는 나에게 꽤나 중요하다. 그래서 한 해를 새롭게 준비할 때 다이어리를 고른다.


기억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나는 이미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물건은 잘 잃어버리지 않는데 가끔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다시 떠올리려고 하면 기억이 뭉텅뭉텅 사라져 있을 때가 많았다. 특히 어린 시절의 일이 그러하다. 다행히 사진으로 남아있어서 아빠가, 엄마가, 혹은 삼촌이, 또는 언니가 '네가 이러이러했잖아'라고 했을 때 나도 모르게 어색한 웃음을 짓고는 '하하하, 내가 그랬나' 하고 만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나의 기억 1번은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다. 눈을 뜬 병실이 어땠는지,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서늘한 느낌과 함께 고개를 돌렸을 때 엄마가 이상한 기계들에 연결되어 있었던 장면이 아주 선명하게 기억난다. (지금 생각하면 우와, 우리 엄마 슈퍼히어로 같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알게 된 건 그 병실은 중환자실이었고, 나와 엄마가 중환자실에 있었던 것은 고작 단 하루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하루가 이렇게 기억에 크게 남을 줄이야!) 이후 엄마와 나는 따로 분리된 병실을 쓰게 되었고, 나는 몇 달 동안 엄마를 보지 못했다.


그에 비해 또 어떤 것은 이상하리라 여길 만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의 기억이 그러하다. 이건 그냥 좀 지워져도 괜찮을 것 같은데 가끔씩 너무 순간들이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 나를 종종 괴롭힌다. 전화를 받았던 학문관 쪽문에서부터 어떻겐가 짐을 챙겨서 나갔던 순간들까지. 엄마가 너무 아파서 위독하니 집에 내려와야 한다고 이야기하던 그 전화 속의 목소리. 한강을 지나가던 지하철의 창문을 보면서, 또 집에 내려가는 버스에서 엄마의 절친인 H이모가 "내려와서도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라고 말해서 오히려 모든 걸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때도. 나도 모르게 장례식장에 와 준 사람들의 얼굴들, 그 자리에서까지 나를 상처 주던 사람들의 말투, 어설픈 연도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는데 그걸 아무도 몰라서 다행이라고 느끼게 되었을 때까지.


가끔 기억은 너무 선택적이라서 힘들다고 생각했다. 좋았던 기억은 왜 이렇게 띄엄띄엄 기억이 나고 나에게 힘들었던 기억들은 이렇게 선명하게 남아서 나를 괴롭힐까. 기왕 이럴 거면 기본 세팅을 좋은 기억을 더 기억하고 나에게 힘들었던 기억들을 좀 더 잘 잊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인간은 생존을 위해 위협적인 순간들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저장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약간의 위안을 주었다.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아도, 추억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안 말이다.


나는 어디선가 내가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기억에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선명히 기억 남는 것은 분명 썩 좋지만은 않다. 내가 선명히 기억하는 사람들만 해도 현재 나와 삶을 같이 하지 않는 경우에는 대부분 나쁜 기억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못된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다. 어쩔 텐가.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 그렇지만 기왕 기억에 남을 것이라면 더 좋은 모습으로 기억에 남도록 살아보아야겠다. 그리고 더 좋은 모습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라면 '내' 기억에 더 좋게 남고 싶다. 다른 누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의 온전한 모습으로.


누구에게도 기억에 남지 않게 살아보고 싶다. 나만이 보는 나의 기억으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서 내가 추억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며. 내가 나의 한 해를 꺼내어 보았을 때 남에게 무해하게, 그리고 나에게는 무탈하게 지내는 것. 꽃잎이 날리는 날들에 릴케의 시가 기억났다. 이해하지 않아도 축제인 날들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그런 마음으로 살길.



인생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인생을 꼭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길을 걷는 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들의 선물을 받아들이듯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맞이하라


아이는 꽃잎을 모아 간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머리카락에 행복하게 머문 꽃잎들을

가볍게 털어버리고

아름다운 젊은 시절을 향해

새로운 꽃잎을 달라 두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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