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단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연 Mar 02. 2024

마음항아리

꼭 위로가 필요하진 않았다. 잘 하고 있다는 응원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야기가 어찌저찌 그 방향으로 흘렀고, 그저 그 방향이 넋두리 비스무리한 그 어디메였을 뿐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100만큼 힘든 것도 아닌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1000이 되고 10000이 되어있으니 말이란 참 무서운 것이구나 새삼 또 느낀다.


언제부턴가 힘든 일이 있으면 입을 다물게 된다. 원래도 힘듬을 크게 표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며 힘듬을 표현하기가 더 조심스러워 지는 듯 하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데, 힘듬은 나누면 배도 반도 아닌 후회가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는 얘기다.

간혹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각자의 힘듬에 대해 이야기가 흐를 때가 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는 위로를, 다른 누군가는 조언을 해준다. 때로 요즘 말로 극강의 T를 만나면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란 미명하에 분석과 솔루션을 받기도 한다. 그게 무엇이든 나의 마음은 편치 않다. 섣불리(혹은 고민 후였어도) 나의 힘듬을 드러낸 것에 후회가 된다. 상대방의 호응에 힘입어 점점 부풀려지는 힘듬의 허상이 그들에게 실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싫다. 그와 비슷한 어떤 상황이 생기면 ‘너는 이런 상황에 이만큼의 힘듬을 가지는 사람이니까.’ 라고 단정지어 지는 것도 싫다. 위로는 고맙지만 공허하고, 조언은 감사하지만 도움이 안되고, 분석과 솔루션은 미안하지만 기분이 상한다. (이정도면 그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것인가? ^^;) 그래서 나는 항상 분위기에 휩쓸려 힘듬 고백에 동참했다 이내 후회를 하곤 한다.

힘듬이라는 게, 시작부터 끝까지 똑같은 게이지로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한달 꼬박 힘든 것이 아니기에, 하루를 펑펑 울고 나면 조금 괜찮아지고, 일주일을 끙끙 앓다보면 또 조금 괜찮아지고, 한달을 울다앓다 하다보면 어느 순간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게 된다. 그렇게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면, “나 사실 그 때 힘들었잖아~” 하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만큼 마음은 단단해져 있다. 그러고보면 ‘힘듬‘이란 ’마음‘이라는 흙을 단단한 도자기로 구워주는 불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랑하고 보드란 흙을 잘 매만져 매끈하고 멋진 모양을 빚어놓아도 뜨거운 불에 넣었다 빼지 않으면 닿는 손길마다 찌그러지고 무너져 버린다. 하지만, 뜨거운 불에 들어갔다 나온 흙은 어떤 손길에도 찌그러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낮은 온도의 불에 들어갔다 나온 것 보다는 높은 온도까지 들어갔다 나온 것이 단단하고, 한 번 불을 경험한 것 보다는 두번 경험한 것이 더 단단하다. 마음도 그러하리라. 어떠한 힘듬도 없이 그저 어루만짐으로만 만들어진 마음은 쉬 찌그러지고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크고 작은 힘듬을 견디고 난 마음은 어떠한 손길에도 끄떡없는 단단한 도자기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듬을 견뎌낸 이들은 설사 마음이 깨진다 해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단단히 빚어낼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다. 자기 마음이 깨질 수 있는 주의사항 하나를 얻었다 생각하고 다시 말랑한 마음을 조물조물 빚어낼 것이다.


나의 마음은 지금 어떤 상태일까? 힘듬의 시간을 지나고 있으니 단단히 구워지는 중일테지? 애벌은 지난 번에 겪었던 것 같고, 지금이 저번보다 조금 더 겨우니 아마도 재벌 중이리라. 가슴 속 가마의 불이 언제 식을 지 모르겠지만, 잘 견디고 잘 버티고 나면 뽀얗고 말간 달항아리같은 마음이, 환한 웃음을 가득 담을 준비를 마치고 가슴 한복판에 자리잡을게다.


그래, 그러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

얼마나 예쁘고 단단한 마음이 나오는지 한번 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옥수수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