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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Apr 21. 2024

죽음의 본질


있어야 한다는

착각


20년 가까이 함께한 강아지의 죽음에 슬퍼하는 주인이 있습니다. 어제까지 멀쩡하게 술을 마시고 놀던 친구가 다음날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기도 합니다. 사회적인 지탄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연예인의 이야기에 놀라기도 합니다. 사고로 자신의 하반신을 절단한 환자는 아직도 그런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건에 깊은 슬픔과 충격을 받는 것은, 그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이라는 마음속의 관념 때문입니다. 머릿속에서는 모든 것이 머물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알지만 정작 우리의 관념은 그렇지 못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 = <존재하는 것>이라는 등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의 관념 속에서는 어제까지 보았던 친구는 오늘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제까지 즐거운 추억을 쌓던 강아지는 내일도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사라진다는 것>은 청천벽력 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마치 아무런 예고 없이 들이닥친 천재지변 같은 것이죠. 특히 그것이 나의 일이라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런데 현상세계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뭔가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있는 것은 계속 있고 없는 것은 계속 없습니다. 다만 인간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 그 속에 스스로를 가뒀을 따름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는 모든 것이 존재하고, 의미와 가치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이야기 속 주인공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래서는 안되는데 말입니다. 소설을 읽다가 주인공이 사라지니 참 황당한 일이죠. 그 갑작스러움과 황당스러움이 고통이 됩니다.


아무도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이라고 일러준 적은 없습니다. 아무도 그것들이 존재로서 이야기를 이끌어가거나 품고 있다고 얘기한 적 없습니다. 그저 우리의 생각과 관념이 그리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과 관념이라는 것은 바로 이원적 관념을 말합니다. 이런 이원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식하는 모든 것을 깍두기 썰듯이 뚝뚝 잘라 버린다는 말입니다. 실제로는 분리된 것이 없는데 그것을 모양에 따라 잘라서 개별적인 존재성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의 이원적 관념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라진 관념에는 이름이 하나씩 붙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비이원에서 이원으로 분화되면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이름 짓기가 상징하는 환상의 시작입니다. 이 환상은 간혹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 근본에는 언제나 고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소멸에 대한 불안감이 언제나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죠. 소멸의 대상은 이원의식으로 분리시킨 것들입니다.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깍둑 썰어 놓은 대상들입니다.


분리되어 존재하는 듯 보이는데, 그것들이 어느 순간 사라집니다. 이것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꽃이 피었다가 죽고, 강아지가 태어났다가 죽고, 무엇보다 내가 태어나고 죽습니다. 있다가 없는 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다가 사라질지언정 오래도록 인식되는 것들을 존재한다고 고집합니다. 그로는 동안 고통은 계속됩니다.



흔들리는

나무귀신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우물 안이 <모든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우물 밖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많은 책과 이야기들이 그 밖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진정으로 우물 밖을 나가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물 밖도 없으니 다만 비유입니다. 비유를 떼어내면 핵심은 이원과 비이원의 이야기입니다. 본래 둘이 아닌 것을 둘로 따로 보는 위대한 착각의 이야기죠.


사과를 사과로 보고 딸기를 딸기로 보는 것, 그 이상할 것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이원성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비이원, 즉 분리됨 없는 것을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것을 이원의식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일상 의식입니다.


네, 맞아요. 저는 지금 우리의 일상의식이 바로 ‘착각’인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러고 있으니 ‘착각’이란 말이 힘을 받기는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고 해도 진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착각이라고는 했지만 그것을 꼭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그 착각이 고통스러우니 거기서 벗어나려고 각자 노력할 따름입니다.


그런 노력으로 신과 천국을 만들어내고, 또는 불로초를 찾아서 세계를 돌아다니거나, 아주 기발하게 윤회라는 세계관을 발병하기도 합니다. 다 좋습니다.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매우 희망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이야기의 근간에 이원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버리면 상황은 판타지로 전락합니다.


나이가 들면 우리는 점점 <없어진다는 것>을 경험하는 횟수가 늘어납니다. 결혼식이나 출산축하 대신 장례식장에 방문해야 할 일이 점점 더 늘어납니다. 나이 오십이 넘어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급격히 즐어든 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부터는 죽음은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죠. 이제주터는 더 진지한 주제로 다가옵니다. 자신이 장례식장의 주인공이 될 때까지 불안감은 고조되고 삶은 빛을 잃어갑니다. 예전에는 구르는 낙엽만 봐도 즐거웠는데 말이죠.


그럴 때마다 생각해 보세요. 이 모든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은 그것들이 존재한다고 간주하면서 생긴 것임을... 무의식적인 관념이 그것들에게 <존재>의 지위를 넘겨주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임을 떠올려보세요. 그 존재라는 관념의 구조가 바로 이원성이라는 전제를 떠올리고, 그런 이원성의 프레임으로 죽음이란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이성이 충분히 발달한 사람이라면 이 근원적인 조건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죽음이란 개념이 세워진 이원적 근본 구조를 모르고서, 막연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흔들리는 나무를 귀신으로 착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이원성 위에 세워진 모든 것은 환상의 속성을 상속합니다. 이것과 저것, 흑과 백, 사과와 사과 아닌 것, 딸기와 딸기 아닌 것의 구분은 모두 이원성 구조애서만 존재하는 환상과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말은 참 강력하죠. 우리에게 가장 강한 각성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그런 죽음이란 것이 환상에 불구하다고 말한다면 과연 누가 납득하겠습니까. 우리 친지들도 죽었고 심지어는 석가모니도 죽었는데 말이죠. 그러나 이원성 안에 세워진 대상이 환상이라면 그 대상의 죽음은 환상 보다 더 한 환상입니다. 무지개의 죽음이 무지개 보다 더 한 환상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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