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불교와 과학의 공통점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학을 탐구하다가 발견한 사실이 불교의 가르침과 유사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서점에 가보면 비슷한 주제의 책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주제가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에서 파생됩니다. 양자역학이 이끄는 이해 불가능한 결론들은 마치 불교의 선문답을 연상시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일반상대성이론이나, 빅뱅, 쿼크, 양자론 등을 탐구하다가 우리가 보는 세계가 실재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중 요즘 눈에 띄는 분은 ‘카를로 로벨리’라는 이론 물리학자인데, 최근에는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이란 책이 한국에서 많이 읽혀지고 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마치 불교의 ‘무아’를 연상시킵니다. 내용은 대부분 비슷한 결론에서 찜찜하게 마무리 되지만, 그래도 비이원을 향한 이원의 도전은 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과학을 신비주의 영역으로 끌고 가는 것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성의 한쪽 측면만을 보는데서 오는 오해이지만, 이것은 신비주의 자들의 비이성적인 언행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일들과, 이것을 이성적인 관점에서 풀어가려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의 학문과 예술적 탐구는 깨어남을 향해 같은 길을 가게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의문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하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출발하기 때문이죠. 지구의 어디에서 땅을 파더라도 결국은 중심에서 만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술을 하는 사람도 과학을 하는 사람도, 겉으로 보기에는 먼 대척점에 서있는 듯 하지만 결국 도달할 곳은 같습니다. 다만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에요.
저는 깨달음을 과학적인 영역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론이 비슷해 보이지만 그 둘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간극은 과학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웬만하면 좁혀지기 어렵습니다. 과학의 관심이 외부의 대상이 아닌 그것을 관찰하는 우리의 인식구조로 관심이 옮겨지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때까지는 과학적 관찰이나 이론의 해석이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로는 대부분 같은 오류에 머물고 있습니다.
도달한 결론은 존재성에 대한 허구지만 그렇다고 그런 결론을 마주한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확인했지만 달라진 게 없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거죠. 실존주의 적인 세계관이 허구임을 확인했는데, 정작 그 사실을 발견한 당사자들은 왜 깨어나지 못하는 걸까요? 어째서 깨어난 과학자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일까요?
사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실상에 대한 그들의 결론이 여전히 이원성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원성 구조 안에서 얻거나 이해되는 지식은 깨달음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꿈속에서 얻은 결론과 해석은 모두 꿈속의 범주에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 전에는 융합과학과 불교에 관심이 있는 정말 훌륭한 석학 한 분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정말 지식이 많으시고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탐구하는 모습이 참 좋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분 역시 우리의 경험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착각이나 환상이라고 말씀은 하셨지만, 과학이라는 이원적 세계관에서 끝까지 발을 떼지는 못하셨습니다.
똑똑한 분들이 눈을 뜨기 어려운 것은 결국 그렇게 부여잡고 있는 개념의 존재성을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놓는다는 것은 개념을 바탕으로 평생을 쌓아 올린 지식을 놓는 것이고 그것은 곧 스스로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흔히들 지식이 많으면 깨닫기 어렵다고들 얘기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깨달음은 의식의 진화라는 과정에서의 일이기 때문에 이성의 발달이 어느 수준까지는 도달해야만 건강하게 발현됩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두뇌가 발달하면 상대적으로 깨닫기가 쉬운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허구성을 보기 위해서는 생각을 넘어서는 도약이 필요한데, 이때 걸려 넘어지는 분들 중 대다수는 역시 머리가 좋은 분들이기도 합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총알의 30배의 속도로 돌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지식으로만 알 뿐 누구도 살면서 그것을 느끼면서 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 즉 지구가 멈춰있다는 느낌(이원성)에 기대어 살뿐이죠. 그래서 과학이 무언가를 발견해도 지적인 호기심만 충족할 뿐 우리의 삶이 변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깨어남의 과정에서 양자역학과 같은 과학을 비유로 설명하는 것은 유익하지만, 그것으로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과학은 상대성의 영역과 비이원을 드러내는 영역으로 나뉘어 발전할 것이고, 그것이 깨달음을 촉진시키는 데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깨달음의 영역에서 축적해 온 지혜는 과학적 결론을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음 공부한다고 경전이나 어록만 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무분별 후득지를 강조하는 것은 역시나 깨달음은 삶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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