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죽음 #깨어남 #석가모니
중학교 시절, 트럭 뒷바퀴에 깔린 여자아이를 눈앞에서 목격한 이후로 꽤 오랜 기간 트럭의 뒷모습이 두려웠다. 지금으로 치면 트라우마라는 그럴싸한 말로 이해되지만, 당시에는 그냥 스스로 극복해야 할 나쁜 기억 정도로 알고 견뎌냈다.
이런 극단적인 일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라도 특정한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산다. 교통사고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운전을 두려워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은 사람은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고, 헤어지는 슬픔을 경험한 사람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찌 보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좋은 것을 향한 욕망보다는 나쁜 것을 피하고자 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돈이 없어 가난해지면 겪게 될 불편함이 두려워 성공하려고 하고, 남에게 멸시당하는 것이 두려워 권력을 가지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기본적인 동력으로 작용한다. 흔히 당근과 채찍이라고 분리해서 표현하지만, 사실 당근과 채찍은 묘하게 서로 맞닿아 있다. 당근을 먹고자 하는 욕망은 채찍을 피하려는 욕망과 맞닿아 있고, 마찬가지로 채찍을 피하려는 욕망은 당근을 먹고자 하는 욕망과 맞닿아 있다.
사람과의 갈등 때문에 가끔 나를 찾아오는 친구들이 있다. 그 사연을 들어보면 대부분은 갈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사람에 대한 불만족이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 놓고 말할 용기가 없다고 한다. 솔직히 말했을 경우 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혹은 그나마 유지되던 관계가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한다. 그래서 결국 퇴사라는 선택을 하려고 한다.
우리는 삶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똑같은 태도를 보인다. 해야 할 것이 있고 알아야 할 것이 있지만, 뒤편에 묻어두고 열어보기를 외면한다. 그 가장 큰 숙제가 바로 죽음의 문제다. 죽음의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면 삶의 가치관도 성립되지 않는다.
삶이 여기서 완전한 끝이라면 충분히 즐기다 갈 것이고, 내세라던가 심판이라는 게 있다면 점수를 따기 위한 가이드를 충실히 지키기 위해 추운 날씨에도 길거리에 나가 전도할 것이며, 다시 태어난다면 선업을 짓기 위해 불우이웃을 돕기 위해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 죽음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을 기반으로 펼치던 우리의 삶은 어찌 되는 것인가? 죽음을 몰라 삶의 의미가 뿌리째 무효가 된다면?
죽음에 대한 다양한 태도는 공통적으로 불확실성을 기반으로 하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죽어보지 않았으니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간혹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또한 내가 죽어본 것이 아니니 완전히 믿기도 쉽지 않다. 그렇게 대부분은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고,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의문은 그냥 접어두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여전히 주위에서는 사람이 죽어가고 자기 역시 삶의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고 온갖 재미있는 것에 몰두한다. 그런데 이것이 30-40대 때는 가능하지만 50을 넘기면서부터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점점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감하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몸이 변화가 느껴지고 통증이 늘어나고 낯선 나를 만난다.
늙음.
누군가는 그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당연하게 생각하려 노력하지만, 그 이면에는 ‘포기’와 우울감이 자리한다. 늙음은 절대 익숙할 수 없는 주제다. 다만 그렇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익숙해지려고 노력할 뿐, 그 바탕에는 역시 두려움이 깔려있으며 그다음은 자포자기와 외면이다. 두려움을 외면하면 그것은 그 영역을 확장해 더 폭넓은 우울과 무기력으로 다가온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기쁨이 줄어드는 것은, 경험 자체의 차이가 아니라 이런 두려움을 외면한 결과다. 말도 안 되는 농담에 마냥 즐거웠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라.
해야 할 숙제는 해야만 한다. 이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돈과 권력에 몰두하더라도 그 또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안다.
그러니 제발,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말자. 자신은 그 두려움을 똑바로 볼 용기가 없어 포기하거나 혹은 외면할 수밖에 없다고 왜곡하지 말라. 나를 두렵게 하는 직장 상사와 마찬가지로 그럴 때 해야 할 일은 그것이 정말 무엇인지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어차피 죽는다면 그 두려움을 한 번 똑바로 마주해 보라. 그 죽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 죽음의 주인공인 ‘나’는 과연 무엇인지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보라고 제안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무기를 손에 들고 그 두려움을 직접 마주하라고 말한다. 백척간두진일보, 어차피 세월에 등 떠밀려 죽을 거, 막다른 길에서 용감하게 스스로의 한 걸음을 디뎌 보라. 그 한 걸음은 ‘이성’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고 두려움의 대상을 깊게 살피는 것이다.
2600년 전에 한 젊은이는 용감하게 그 죽음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길을 떠났다. 6년의 고행을 통해 수행의 궁극에 올랐으나, 여전히 죽음이 뭔지 모른다는 절망감에 모든 고행을 포기하고 보리수 아래에 앉아 깊은 ‘사유’에 잠겼다. 무념무상이나 깊은 삼매가 아니라 ‘사유’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답을 세상에 내놓았다. 무려 2600년 전에.
그런데 왜 그 가르침은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 충분히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못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인간의 이성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서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은 준비됐지만 가르침이 실종되거나 왜곡되었다.
우리 대부분은 2600년 전의 석가모니보다 훨씬 뛰어난 이성을 갖고 있으며, 충분히 다양하고 효과적인 수단에 둘러싸여 있다. 필요한 것은 당신의 관심과 용기이며, 그것을 도와줄 지혜와 시스템뿐이다. 그리고 두려움에 대한 스스로의 선택뿐이다. 외면하거나, 마주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