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원 #비이원 #연기법 #칸트 #순수이성비판 #이성의한계
이제 고1의 인생을 지나고 있는 딸아이가 밥을 먹다가 문득 묻는다.
“아빠, 우리의 이성으로는 결코 진실을 파악하는 게 불가능한 게 아닐까?”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생각은 그저 인간의 생각일 뿐인데, 그 생각을 만들어낸 것이 더 진리에 가까울 텐데, 피조물인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
어릴 때부터 아빠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딸아이는 이제 이성이라는 인간의 도구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내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해 줬지만, 아직 시원하게 의문이 풀린 눈치는 아니다. 아직은 세상을 착각된 그대로 마음껏 경험하고 누려야 하는 시기라, 더 이상 깊은 얘기는 하지 않았다. 언젠가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심각하게 고개를 들 때, 세상에 없는 아빠가 간간이 정리한 글들이 필요한 시기가 올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때문에 나는 이런 글을 남기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자가 태양을 알 수는 없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 도출한 결론은 이 그림자와 같아서 결코 실상에 접근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컴퓨터 게임에는 주어진 시나리오에 따라 게임의 진행을 돕는 일종의 프로그래밍된 캐릭터들이 있다. 그것을 보통 NPC라고 부른다. 플레이어가 다가가 이 NPC에 말을 걸면 무기를 팔거나 미션을 주거나 게임 플레이에 중요한 팁을 전해 준다. 이 NPC는 게임 세상의 본질이 코드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사용하는 생각의 알고리즘이 바로 코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는 것은 진실을 찾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다. 우리가 어떤 안경을 쓰고 진실을 찾는지 알아야 그 결과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찰 도구가 망원경인지 현미경인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목표를 향해 앞으로 치닫던 관심을 잠시 멈추고 우리가 착용하고 있는 그 안경, 즉 우리의 이원적 인식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이 근본적인 과정을 생략한다면, 그 무엇을 알아내더라도 그 인식 구조에 종속된 부차적인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절대 저절로 깨달아지지는 않는다. 물속의 물고기가 물 밖으로 한 번은 나와 봐야 자신이 그동안 물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듯, 우리에게 익숙한 이원성을 벗어나 봐야만 비로소 인지가 가능하다. 꿈을 꾸는 동안에는 그것이 꿈인지 모른다. 깨어나 봐야 비로소 그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이것이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이 글을 읽고 해석하는 것 역시 이원적 인식 구조의 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꿈속의 일이다. 그만큼 당신의 삶과 가까운 주제이며 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당신의 이야기다.
이원적 구조에 바탕을 둔 ‘이성’을 통해 발견한 것은, 그것이 신이든 혹은 또 다른 숭고한 것이든 똑같이 이원적 인식 구조를 통해 재구성된 이야기다. 이 말은 당신이 이야기를 말 그대로 꾸며 낸다는 의미다.
사과는 죽었다 깨어나도 사과가 맞는 것 같고 이 휴대폰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맞는 것 같지만, 그것을 사과라고 혹은 휴대폰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은 바로 당신의 선택이다. 말 그대로 당신의 ‘선택’이다. 오늘 내가 노란 옷을 입고 나가기로 하고 옷장에서 노란 옷을 직접 선택하는 것 같은 스스로의 선택이다. 생각의 주체가 ‘나’가 아니므로 선택이 아니라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마치 자연의 법칙처럼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부분은 더 큰 주제의 전개가 필요하므로 다른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이원성이라는 말은 둘로 나뉘었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모든 것이 마치 따로따로 분리된 것으로 착각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세상이 드러나고 표현되는 기본적인 방식이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문제는 이로 인해 불필요한 고통을 겪는다는 데 있다.
세상이 구현되는 방식이 이원적이고,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로 이원적이다. 세상을 인식하는 그 자체 또한 세상의 일부분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원적으로 펼쳐지는 내용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것을 만들어내는 더 근원적인 것을 놓치며 산다는 데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코끼리 뒷다리를 만지면서 앞다리를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성의 한계는 명확히 드러나 있지만,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 마냥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실제로 그것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화면의 본질이 그저 움직이는 빛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보다, 내용에 빠져들어 감독이 의도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 아직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화에 관심을 가질 시기가 따로 있다. 영화에 식상하거나, 내용에 상처를 받았거나, 절망한 사람들이 우연히 실상을 마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원성의 이야기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의식의 진화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의 성장은 마치 오랜 시간 진행된 진화의 여정을 축소한 것과 같다. 그 여정의 흔적은 우리의 뇌에 겹겹이 쌓여 있으며, 그 흐름에 따라 성장 과정을 밟는다. 예를 들어,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이성이 전혀 발달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난다(전이성). 그리고 태곳적 의식 상태와 신화적인 상태를 지나 비로소 현재의 평균 의식인 이성적인 의식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발달 심리학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흐름이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태곳적, 혹은 신화적 상태에 머무는 경우도 있으며, 병리적 이유로 전이성의 영역에 머무는 경우도 있다.
전이성을 제외한 각각의 지점에서는 비이원의 깨어남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성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엉뚱한 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으며, 가장 건강한 경우는 물론 이성이 충분히 발달한 상태에서 그것을 통합하고 넘어서는 것이다. 신화적인 의식 상태에서는 논리적인 것보다 신화적 이야기에 빠지기 쉬우며, 여기가 바로 종교로 파생된 이야기에 사람들이 끌려드는 지점이다. 각종 무속 신앙과 초능력과 같이 도를 넘은 지점도 있지만, 정상의 범주로 간주되는 종교적 행위조차도 사실은 신화적 의식과 마찬가지로 같은 범주에 속한다.
일률적으로 짜인 흐름에 따라 인류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는 다양한 의식의 사람들이 존재하며, 이로 인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쉽게 벌어진다. 이런 갈등을 조정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살아가지만, 이것은 게임의 구조상 자연스러운 일이다.
깨달음은 충분한 이성을 갖춘 사람들의 다음 단계의 진화다(진화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물론 전이성의 상태에서 샛길로 빠져 실상을 체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의식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면 그것을 다시 세상에 해석하고 풀어갈 때, 황당하고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야기한다. 이성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현자들이 현대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깨어남은 신비함에 끌리는 전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이성을 딛고 포함하는 이성의 영역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그래야 건강한 깨달음이 가능하며, 그래야 깨어남이 진리 탐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삶을 위한 깨어남으로써 제대로 된 역할을 하게 된다.
깨달음이 삶의 도구와 같이 세속적인 범주에 머무는 것이 바람직하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실 인간의 깨달음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 외에는 다른 목적과 의미가 없다. 이미 ‘진리가 아닌 것이 없다’는 기본 전제에서 순수한 진리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시 말해, 깨달음이란 인간의 깨어남을 의미한다. 인간 외에 깨달음이 필요한 존재는 없다. 깨달음이란 말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깨달은 상태로의 전환을 표현하는 말이다. 때로는 진리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진리 자체를 논하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 있을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로 불필요하며, 깨달음은 오직 인간에게 필요한 다음 진화를 돕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성의 다음 단계로서의 진화가 바로 깨어남이라고는 하지만, 이성이 극도로 발달한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왜 그 한계를 쉽게 넘어서지 못하는 것일까? 아인슈타인도, 스티븐 호킹도, 니체도 왜 그다음 단계인 깨어남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못했을까?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은 궁극의 이성적 사유를 시도한 한 인간이 그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몸부림이었다. 과연 칸트만 그랬을까? 대단한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이런 의문을 떠올려 봤을 것이다. 생각으로 실상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무시무시한 블랙홀 속으로 운명처럼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삶이 무엇인지 모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이 의문은 비단 칸트만의 것이 아니다.
이성을 통해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는 칸트의 의견은 일정 부분 수긍이 간다. 그러나 수긍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기는 했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는 데는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칸트가 ‘칸트’라는 한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관점이 바로 이원적 관점이다. 그로 인해, ‘나’라는 관점을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를 마치 공리처럼 간주했거나, 혹은 따져볼 엄두를 내지 못했거나, 적절한 인연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현대의 종교처럼 굳게 믿고 있는 이성의 한계는 정말 넘어설 수 없는 것일까? 칸트가 멈췄던 그 지점에서 우리도 멈춰야만 할까? 이성을 통해 이성을 넘어서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림자가 태양을 아는 것이 가능할까? NPC가 게임의 근본 알고리즘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의 이성은 실상을 파악하는 데 유효한 도구가 맞는 걸까? 과연 이성을 통해 이성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가능할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다고 여겨져 왔다. 그래서 “개념을 짓지 말라”거나 “분별하지 말라”라고 하며 끊임없이 수행자들을 괴롭혀 온 것이다.
여기서 석가모니의 연기법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사실, 등장한 지 이미 2600년이 지났지만, 그 연기법을 바탕으로 불교라는 종교 형태가 사람들에게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연기법을 통해 깨어난 사람은 극히 드물다. 불교의 흐름이 기복과 신앙의 형태로 자리 잡으면서, 오히려 석가모니의 연기법에 맞지 않는 너무나 많은 종교적이고 이원적인 이야기들이 덧붙여졌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또 하나의 꿈속으로 인도되었다. 끓는 물에서 꺼내 얼음물에 넣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연기법은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고 그것을 이성적인 접근 방식으로 넘어서게 하는 참으로 탁월하고 뛰어난 공부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교 깊숙이 숨겨져 있는 탓인지, 아쉽게도 이를 제대로 가르치거나 안내하는 곳은 거의 없는 듯하다. 하지만 곧 그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운동선수가 아니더라도 건강을 위해 헬스클럽에서 스쿼트를 하듯, 연기법은 이제 종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행복을 위해 누구라도 당연히 해야 하는 공부로 자리 잡을 필요가 있다. 깨어나기 위해 종교나 믿음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종교와 믿음 때문에 그 핵심이 가려지고 멀어진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야기와 믿음을 근간으로 하는 종교는 일시적인 위안이나 윤회, 혹은 천국과 같은 또 다른 달콤한 꿈을 약속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원성 안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꿈속 이야기일 뿐이다.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는 것이 바로 꿈에서 깨어나는 시작이며, 또 다른 꿈으로 빠지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다.
붉은 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세상은 모두 붉은색이다. 당신이 쓰고 있는 안경은 이성(이원성)이라는 이름의 안경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것 역시 그 안경을 쓰고 읽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보고 있는 세상이 달리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