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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윤하 Jan 31. 2021

여름으로 차오르던 낯선 나라

연구원을 나와 독립하다    

연구원이 세종시로 이전하게 되면서 연구원 생활을 그만두기로 했다.

세종 이전 이야기가 나왔던 초기부터 결심하고 있던 부분이라 련없이 (신나게)그만두었다.


실은 지쳐있었다.


출퇴근의 반복, 음악 활동이 끝나간다는 예감, 가진 것을 점점 소진해간다는 느낌 때문에 삶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2년 차에 접어들며 주 4일 근무를 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연구원 바깥일을 일부러 늘려갔다.


두 번째 단독 공연을 기획해 열고, 아동복지센터 아이들과 함께 음악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회사 생활과 싱어송라이터 삶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인 동시에 조금이나마 음악과 관련 있는 일을 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안간힘이었다.


지쳐가는 게 당연했다. 어찌 보면 단 하루도 편히 쉬는 날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땐 그게 힘든지 몰랐다. 오히려 스스로 일을 늘려 몰두할 거리를 찾아다. 미래가 불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미래연구자와 싱어송라이터, 둘 다 확신이 없었다. 깊이 고민한 건 아니었다. 바빴으니까. 어쩌면 고민하지 않기 위해 점점 더 바빠져야 했다.   


그렇게 서서히 세종 이전 시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만약 끝이 없었다면 조금은 긴 호흡으로 나를 다독였을 수도 있을 텐데, 연구원이 떠나는 시기와 나의 떠나는 시기를 맞추어 놓고 돌진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미리 비행기 표도 사버렸다. 퇴사하고 3일 후 호주로 떠나는 일정이었다.


화려한 끝을 계획해 놓은 후에는 더더욱 일상을 불태우듯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어떻게 그 모든 것을 해내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가 잘 살고 있구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모습은 내게 너무 중요했다. '나는 잘 살고 있어. 적어도 열심히는 살고 있어.' 하는 읊조림과 함께.


그렇게 연구원 생활을 뒤로하고 시드니로 떠났다.


한국은 겨울이었지만 여름이 한창인 나라. 코트의 무게 조차 버거웠던 한국 생활을 뒤로하고 얇은 원피스 하나만 걸친 채 매일 바다를 보러 갔다.

호주에서 만난 다양한 바다의 얼굴
내 생에 가장 뜨거웠던 12월

침묵 속에서, 낯선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고 싶은 만큼 걸었다. 멈추고 싶으면 멈췄다. 멜버른으로 옮겨가서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 집으로 갔다.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시드니에서는 그저 바라만 보았던 바다에 뛰어들었다. 차가운 바다 수영을 하고 뜨거운 모래 위에 푹 쓰러져 몸을 덥혔다. 그렇게 깔깔대며 선물 같은 여름을 만끽했다.


당시의 여행은 온도로 기억다.


처음 느껴보는 뜨거운 태양빛, 챙이 넓은 모자로도 가려지지 않던 햇살의 눈부심(소중히 쓰고 다니던 하얀 모자는 바다 위로 날아가 버렸다. 함께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파란 바다 위 하얀 모자가 둥실둥실 멀어지는 걸 보며 다같이 탄식), 내 안의 습기를 바짝 말려 버릴 듯이 건조했던 바람까지.


불순물이 조금도 깃들지 않은 순수한 여름날이
12월에 펼쳐지고 있었다.


당시 나는 여전히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 불안했지만 티 없이 맑은 여름 하늘과 무심히 화창하게 반복되는 뜨거움위로가 되었다. 그 변화 없이 꾸준한 날씨가 좋았다.


내가 어디서 왔건, 어떤 마음으로 그곳을 걷건,
여름으로 차오르고 있는 낯선 나라는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나도 조금씩 나를 놓아주었다.


길 위를, 바닷가를, 육지의 끝을 걷고 또 걸었다
윌리엄스 타운, 바다 수영 전(혹은 후), 초대받은 카롤리나의 집에서 오랜만에 노래를 불렀다

한 달 후,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추웠고 나 역시 전처럼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이제 회사도 그만두었으니 내고 싶었던 앨범을 내도 좋을 시기였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실은 나의 싱어송라이터 생활이 지지부진해진 것이 미래연구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는 핑곗거리가 없었다. 겨울잠을 자듯 그저 멈추어 힘을 비축하는 수밖에.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겉으로는 쿨한 척했지만 마음은 불안했다.

꺾이지 않을 것 같던 추위도 점점 물러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미래연구의 길을 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미래학을 전공할 수 있는 학교는 한 군데뿐이었는데 그곳을 졸업한 1회 졸업생들이 민간 미래연구 기관을 세우게 된 것이다. 미래연구 경험이 있고 실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하여 세종에 가신 박사님이 나를 그곳과 연결시켜주었다.


그렇게 커리어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다만 이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미래연구를 지속하게 되었지만 더는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둥지를 떠나 프리랜서 연구원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누구도 나를 보호해 주지 않고, 나 대신 책임져주지 않는 '진짜 세상'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기타를 매고 원하는 요일에 맘대로 출근하던 괴짜 연구원은 이제 떠나보내야 했다.

이전까지는 누군가의 '기대치 이상'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이제부터는 '혼자서 잘' 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미래연구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발을 들였던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점점 질문이 많아졌지만 답을 알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래연구 3년 차, 나만의 고군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멜번의 어느 묘지에서

묘지에서
- 2014. 12. 21.

멜번에서 처음 맞이하는 목요일, 묘지에 갔다.
시내에서 트램으로 15분 정도면 도착하는 묘지는 일상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따가웠다. 언니는 혼자서도 이 묘지에 몇 번인가 찾아온 적이 있다고 했다.
넓은 묘지에는 오직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다. 종교별로 나뉘어진 구역을 우린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반짝거리게 닦여진 화려한 묘가 있는가 하면 거미줄이 드리워진 묘와 잡풀에 뒤덮인 묘, 기울고 부서진 묘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고 어떤 이들은 완전히 잊혀져 자리만 남아있었다.
아이를 모두 잃고 늙어간 부부의 가족묘와 배우자를 먼저 잃고 옆자리를 비워둔 묘, 손으로 비뚤게 이름을 새긴 묘비, 익살스런 개구리 모형을 놓아둔 묘가 있었다. 자리와 자리마다 12월의 태양이 고르게 비추었다. 우린 햇살을 가르며 때때로 묘비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작은 카메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압축된 시간이 그곳에 촘촘히 세워져 있었다.
딱딱한 돌판과 메마른 흙과 끈질긴 풀들과 무심한 가짜 꽃들이 뒤섞여 무언가를 기억하려 애썼다.
그러나 묘지는 어쩔 수 없이 바래어갔다.
시간은 훌쩍 흘러있었다. 카롤리나의 저녁 초대를 받은 우리는 서둘러 묘지를 빠져나갔다. 우리의 몸을 따라 흐르던 시간은 묘지에 남겨졌다.
가족이란 유일하게 기억해주는 존재인 거야,
하던 수진 언니의 말이
가족이란 유일하게 존재하는 기억인 거야,
라는 이야기로 들려왔다.
그 순간엔,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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