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컨설팅 펌과 함께한 4개월간의 여정
올여름 퇴사 후 3개월 정도 안식년을 갖고 싶었다.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지금껏 한 번도 쉬어본 적 없어서 지치기도 했고, 무모하지만 넥스트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 속에 난 어떤 선택을 할지 스스로가 궁금했다. 하지만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글로벌 컨설팅 펌 내 임원분의 제안으로 4개월 그로스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됐고 이제 막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시점에서 스스로 회고를 해본다.
1. 약 4개월 프로젝트 기간 동안 클라이언트 사이트로 출퇴근하여 업무가 진행되는 방식이었고 내가 사는 곳과 30Km 이상 떨어진 곳이라 많이 멀었다. 사실 거리의 문제보단 마음먹은 안식년을 뒤로 미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훨씬 컸는데 이 프로젝트가 국내가 아닌 해외 유저를 바라보고 있어서 그만큼 방대한 데이터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지적 호기심이 컸고, 유명한 글로벌 전략 컨설팅펌의 컨설턴트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특이한 건 일반적으로 경영 컨설팅을 하는 곳이지만 내가 참여한 프로젝트 조직은 DT관점에서 실행 파트까지 관여하는 그로스 프로젝트였다.
2. 해외 파트 커머스 매출 볼륨을 성장시키는 게 궁극적인 목표였고, 나의 역할은 퍼포먼스 마케팅 자문 및 운영 지원이었다. 근래에 점점 퍼포먼스 마케팅이 '단순 Paid Media의 운용력'으로 포지셔닝되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내 입장에선 오히려 명확한 범위에 밀도 있는 접근이 가능하므로 나쁠 게 없었다.
3. 대략적인 흐름은 [전략 및 전술 수립 > 환경 구축 > 가설 수립&테스트 > 스프린트&성과 개선 > 산출물 인계] 형태로 진행됐는데 이 과정에서 인상 깊었던 건 가설 리스트와 선정 포인트(배경), 그리고 성과지표 등에 대한 전체 내용이 상당히 촘촘한 내용으로 문서화된다는 사실이다. 스타트업도 조직 내재화를 위해 문서화가 중요한데 무엇보다 속도가 생명이라 빠른 실행력을 우선으로 한다면 컨설팅에선 사소한 행위에도 납득할만한 근거와 논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더 놀랐던 건 그분들의 전문 분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설이 작성된 배경들과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든 어떤 지표들을 확인해야 하는지 생각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역시 주변에 러닝 커브가 빠른 사람들이 많으면 일이 참 편하다.
4. 해외 대상이다 보니 iOS 유저가 많아서 ATT(app tracking trasparency) 정책으로 분석에 제약이 많았다. 페이스북/인스타그램 광고의 경우 가뜩이나 '인앱브라우저' 이슈로 인해 광고 관리자 데이터와 GA 데이터 간 괴리가 큰데 과거 페이스북 광고 보고서에서 제공했던 일부 상세 지표들마저 더 이상 제공하지 않게 돼서 여러모로 골치가..ㅜ 광고와 GA의 성과 인정 방식이 다르다는 걸 감안해서라도 전환 데이터 차이가 심해 어떤 걸 신뢰해야 할지 애매한 경우는 비단 나뿐만은 아닐 거다. 이때 한 가지 팁이라면 페이스북 이벤트 설정 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브라우저 픽셀' 방식 외에 '전환 API' 방식도 함께 사용하는 걸 권장한다. 후자는 브라우저간 이탈 문제와 관계없이 서버 to 서버로 전송되는 방식이라 픽셀의 취약점을 꽤 보완해줄 수 있는데 실제 2가지 방식으로 이벤트를 설정하고 난 뒤로는 GA 데이터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주의할 건 2가지 방식으로 모두 사용할 경우 자칫 중복 데이터가 집계될 수 있다는 점이고 이 부분은 별도 체킹 후 수정해야 한다. '어트리뷰션의 올바른 이해와 유저 트래킹'은 모두에게 공평한 숙제지만 역량에 따라 공평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5. 역시나 광고의 문제는 광고 자체만으로 해결하긴 어렵다. 우수한 CPC와 CTR이라 해도 결국 전환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이땐 클릭 품질의 문제인지, 연결 URL이 문제인지 결제 행동 단계에서의 문제인지 알아야 하는데 이건 광고 데이터에서 제공해줄 수 없는 영역이다. 철저히 온사이트 마케팅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유저 행동을 파악하기 위해선 밀도 있는 로그분석(고객 행동 데이터 분석)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꽤 많은 기업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자주 목격하는데, 처음엔 뭘 봐야 할지 모르다가 점차 보고 싶은 지표들을 스스로 질문할 수 있게 되고, 원하는 데이터를 하나씩 가공해서 보려고 할 즈음.. 그걸 보려면 애초에 분석 가능한 설계가 세팅되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밀도 있는 분석 이상으로 중요한 건 내가 보고 싶은 데이터를 볼 수 있게 만드는 초기 세팅과 환경 구축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를 가장 빨리 해결하는 방법 또한 나 스스로 좋은 질문을 많이 던져서 보고 싶은 지표를 뽑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6. 액면의 숫자가 늘 진실을 말하진 않는다. 가령 한 시즌 A팀과 B팀의 승률이 각각 50%, 65% 일 경우 B팀을 강팀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실제 A팀은 후보 선수들의 기회 제공을 위해 1.5군으로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었고, 만약 B팀도 동일한 구성으로 경기했을 때의 승률을 따진다면? 이처럼 전체를 봤을 때와 특정한 기준으로 분류해서 나누어 봤을 때는 전혀 다른 숫자가 나오기도 한다. 숫자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진실은 다를 수 있다. 전체와 부분을 함께 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7. 재구매가 발생하는 대부분의 커머스에선 CRM 마케팅은 이제 국룰이되었다.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는 CAC를 감당하려면 보다 로열티 있는 고객을 찾아내고, 늘려 가는 게 매우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마케팅 자동화' 슬로건을 내세운 여러 CRM 마케팅 툴을 접하게 되는데 자동화의 핵심은 '좋은 트리거 포인트를 설정' 하는 것이다. '자동화'라는 것도 어찌 됐든 내가 설정한 조건에 부합되는 유저가 유입되거나 특정 이벤트를 수행했을 시 자동으로 메시지를 띄우게 되는데 그럼 여기서 어떤 조건을 설정해야 성공적인 CRM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걸 설계하려면 전자상거래 퍼널 단계 별 데이터 흐름, 트래픽 품질이 좋은 소스/매체, 기여 가치(거래)가 높은 페이지, 유입 고객의 검색어, 유입 후 결제까지 걸리는 평균 소요 일 수, 장바구니 담은 고객의 결제 비중 등등 고객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산업마다, 아이템마다, 서비스마다, 웹사이트 구조마다 이용하는 패턴이 모두 다르고 이는 고객들이 우리 웹사이트(앱)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다양한 관점에서 데이터를 볼 수 있어야 의미 있는 마케팅 활동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에 맞는 메시지 전략은 당연히 뒤따라야 하는 거고.
8. 동일한 언어, 성별, 연령 등의 타깃에게 같은 메시지를 던져도 몇몇 국가는 상이한 결과가 나왔다. 국가를 쪼개 매체 별 트래픽 품질과 퍼널 데이터를 확인해보니 특정 국가에서 결제 행동 단계 중 무난하게 진입하다가 '체크 아웃' 페이지에서 상당 부분 이탈한다는 걸 발견했다. 왜 결제를 코앞에 두고 몽땅 나가는 걸까. 내부에서 확인한 결과 결제 수단을 선택할 시 그들이 원하는 결제 방식이 부재하다는 걸 알게 됐다. 실제 동남아 중 몇몇 국가에선 신용카드 보급률, 사용률이 현저하게 낮더라. 몇 년 전 디지털 써밋을 참관했을 때 어떤 연사분이 국가 별 문화와 세계관을 이해하는 게 고객 데이터를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땐 단순히 공감했다면 지금은 피부로 체감하는 중이다.
이럴 때 보면 우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도 잘 모르면서 그 깟 모니터에 찍히는 숫자만으로 무슨 인사이트를 얻으려 하는지.. 다소 위화감 느껴질 때가 있다.
9. 짜잔. 함께 고생하신 컨설턴트 분들 덕분에 스프린트 기간 내 좋은 성과를 일궈냈다. 숫자와 함께 표현된 J커브가 있는데 보안 상 표현할 길이 없어 아쉽.. 그로스 업무를 하다보면 100중에 80은 잘 안되고, 힘들고, 지치지만 마약과 같은 20의 짜릿함이 너무 좋아 이 맛에 일하는 것 같다. (클라이언트 성과 말고 내 주식 차트나 이렇게 만들어야 하는데...)
10. 유능한 컨설턴트분들과 그로스 프로젝트를 함께 하면서 그분들이 일하는 방식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었는데 공통된 특장점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영어를 모두 잘했고, 의사소통 스킬이 좋았으며 무엇보다 구조화된 사고방식과 쪼개어 나눠 보는 시각이 매우 뛰어났다. 그래서 애초에 문제를 발견하면 발생한 진원지를 빠르게 찾고, 그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앞뒤의 맥락을 논리적으로 따져 보는 게 탁월했다. 업무 특성상 압축 성장에 특화된 느낌이랄까. 아마 나와 똑같은 시점에서 마케팅을 시작했다면 지금의 나보다 훨씬 잘했을 거다.
P.S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프로젝트였고, 나에게도 배운 게 많았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처음 프로젝트 합류 제안을 받았을 땐 감사하기도, 부담되기도 했지만 호기심이 그 모든 걸 앞섰다. 콜업 받고 왔는데 '최소 1인분은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나름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 함께 했던 컨설턴트분들로부터 다음 프로젝트도 같이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아, 그래도 내가 1인분은 했구나.. 하는 생각에 맘은 편하다. 좋은 프로젝트를 제안주신 최인철 파트너(컨설팅 그룹에선 임원분들 호칭이 파트너라고 한다)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매일 늦은 밤까지 고생하신 PM님과 컨설턴트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린다.
모두가 고생한 만큼 좋은 결과로 이어진 개운한 프로젝트였다.
모두 메리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