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이 좋아요~
내가 하는 습관적인 말중에서 남편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다.
" 난 나이가 너무 많아"
그냥 그말에 나를 가둬뒀었다..난 장애아의 부모니까....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장애아의 부모로 산다는건 정말 경험하지 못하면 상상을 못할만큼 힘든 일이다. 나의 아이는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죽다가 살아난 케이스이다. 뱃속에서 탯줄을 양 다리에 감았고 바둥거림속에 산소공급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태어났을땐 제대로 울지 못했다. 아이를 낳았을때 손가락 발가락숫자만 챙겼고 나는 감히 나의 아이가 장애가 있을것이라는 상상을 하지도 못했다. 그런일이 나에게 있을줄이야...
아빠가 대학교 2학년떄 돌아가시던 날......1997년 한창 IMF로 온나라가 떠들석 하기 직전...아버지는 정말 드라마처럼 쓰러지셨고 한달간의 짧은 투병생활 끝에 돌아가셨다. 그전까진 나는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왔고 그런일은 나에겐 일어나지 않는 남들의 이야기로 생각이 들었다. 이 사건이 나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고 나는 지금 미국 실리콘 벨리에서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에 장애아를 키우면서 서있다.
그때 이미 깨달았어야 하는데....그런 드라마 같은 일이 또 일어날수 있다는 사실을.....내 아들이 장애가 있다는것을 아이가 10개월째 제대로 앉지 못하는 아이를 보고 깨달았다. 다른 아이들과 우리 아이는 다르구나
그렇게 재활을 하면서 보낸 지난 5년의 생활....부족하지만 쌓아왔던 나의 커리어를 포기 하지 못해 나는 아이의 치료와 일을 병행하면서 한마디로 존버했다. 아이는 재우는것도 1-2시간이 걸렸고 자기 시작해도 3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항상 새벽 2-3시가되면 깨서 이유 없이 울었고 나와 남편은 아이와 실랑이 하면서 새벽을 보내고 결국 2-3시간 칭얼거리다가 새벽 5시-6시가 되어서 자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출근을 해서 회사에서 진한 커피를 마시며 버티고 버티었다. 그러다가 미친듯이 아이 치료를 위해서 반차를 쓰고 미친듯이 돌아다니기를 4년....우울증 약을 먹으며 공황장애를 이기며 섬유근육통을 버티며 나는 그렇게 버텼지만 결국 나는 나의 건강을 망쳤고 그리고 레이오프를 당했다
다 끝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아이를 나에게 주셨을까? 난 감당이 안되는데...난 능력도 없고 영어도 잘못하고 건강하지도 못한데...나에게 아픈 아이라니....
펜데믹 기간동안 장애아이를 집안에만 가두어 놓는것이 안타깝고 재활치료를 더이상 다니지 못하는것이 너무 걱정이되서 시작한 등산이 나의 생각을 조금씩 바꾸어 놓았다. 주말 2틀동안 무조건 산에 갔다 첨에 아이는 가기 싫어했지만 집에만 있다가 나가니 조금씩 걷기 시작했고 이젠 두시간은 거뜬히 산행할정도로 늘었다. 이 산행은 나의 생각도 바꾸어 놓았다.
그런 내가 지금은 너무나 하고 싶은것이 많아졌다. 오늘의 나는 아직 내일의 나보단 젊다. 세상에 내가 모르는게 너무 많고 하고 싶은것도 많다. 주위에 보면 참 다들 현명하고 똑똑하고 열심히 산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간에....
나보다 한살 어린 친한 동생이 있다. 그 친구는 4살짜리 아이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며 대학원을 다니며 그리고 유투버를 한다. 그소리를 들었을때 처음엔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 열심히 사는걸까 이해가 안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친구를 닮아 가려고 애쓰고 있다.
하루에 40분씩 운동을 하고 주식도 조금씩 사보고 브랜치에 글도 써보고...트라이 해보고 싶은 것들을 리스트 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주면 감사하겟지만 그렇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계속 글을 쓸것이고 그 끝에는 뭐가 있는지 알순 없지만 가보려 한다.
나의 아이는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자기만의 속도에 맞게 커가고 있다. 요즘 막 그네를 혼자서 타기 시작했다 늦게 시작한 만큼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너무나 기특하고 대견하다. 평범한 하나의 행동들이 아이에겐 얼마나 힘든것임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그저 그아이의 뒤에서 나의 최선을 다하면서 오늘도 뚜벅뚜벅 걷는다.
4/23/21
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