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색 스위치

by 쓱쓱


이사 기념 새 헤어드라이기를 장만했다.

다0슨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생김새는 얼추 비슷하고 기능은 충분한,

그런 헤어드라이기.


머리를 감고 돌아와 처음으로 전원을 켰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스위치를 살펴보다 눈이 멈췄다.

빨간색과 파란색 사이, 거기에 주황색이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나는 지금까지 드라이기란 찬바람 아니면 뜨거운 바람,

딱 두 가지의 경험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큰 딸에 의하면 물욕이란 것 자체가 없는 사람이자,

엄마에 의하면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나라 경제가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는,

뭐, 그런 종류의 사람으로서 기술과 트렌드에 매우 둔감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은 드라이기가, 다O슨도 아닌 이 녀석이,

내게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다.


사이가 있어요.

중간이 있다고.


반신반의하며 주황색으로 맞춰 스위치를 올렸다.

바람이 나왔다.

뜨겁지 않았다.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따뜻했다.

머리카락을 건조하게 태우지도,

눅눅하게 방치하지도 않는 딱 그 온도.

상쾌하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드라이기를 든 채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리를 말리다가 감동을 받을 줄은, 이 나이에 몰랐다.

나중에 생각하면 좀 웃길 것 같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지하게 뭔가가 꿈틀 했다.


어쩌면 지난주 나의 몸과 마음의 상태가 한몫했는지도 모른다.


지난주는 유독 빨간색과 파란색을 왕복하는 한 주였다.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짜증이 솟구치는 일이 있었고

그 후엔 여전히 덜 익은 떪은 감처럼 미성숙한 내면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에

스스로 실망하며 힘이 빠졌다.

그리고 그 진폭 사이에서 축이 나는 건 결국 몸과 마음이었다.

격렬하게 살아있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지속되는 건 아무것도 없는 그 느낌.


젊을 때는 태양이 새빨갛다고 믿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열정, 확신, 선명함.

빨간색이 더 강렬하고 더 진지한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조금 다르게 생각되었다.

태양의 핵은 사실 주황색에 가까운 게 아닐까 하고.

46억 년째 꺼지지 않고 있는 그 별의 핵심 온도가,

바깥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차분한 색일 수 있다는 것.


단번에 태우는 것보다 끝까지 온기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어렵고,

그것이 어쩌면 더 위대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마음을 주황색으로 유지하는 건 드라이기 스위치를 돌리는 것만큼 쉽지는 않다.

손가락 하나로 되지가 않는다.

빨개지지 않으려 참다 보면 어느새 파래지고,

다시 뜨거워지려 하다 보면 또 타버린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맘대로 안 된다.


그래도 알게 됐다.

적어도 주황색이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 뜨거워도,

너무 차가워도 사람은 달아난다.

오래 곁에 남는 온도는 결국 주황색이다.


나를 태우지 않고,

상대를 얼리지 않고,

그냥 뜨뜻하게.

그게 가장 오래가는 방식이라는 걸.


드라이기를 끄고 거울을 봤다.

머리가 잘 말라 있었다.

뜨겁지도, 눅눅하지도 않게.


오늘 하루는 주황색으로 살아봐야지.

나도 주변도 조금은 상쾌해질 수 있는 온도로.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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