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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rizo Mar 29. 2020

펜데믹 이전의 어떤 날에 대한 기록

페페의 코로나 일기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이상한’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벗겨보자면, 모든 것이 비일상적인 날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석 달 여의 시간이 지났지만, 누군가 그날에 대해 나에게 물어온다면 나는 그날의 감각을 어제의 일처럼 아주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중국발 신종 바이러스가 사람을 통해 전염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온 지는 좀 되었습니다. 포털 사이트를 새로 고침 할 때마다 국내 한국인 바이러스 감염자 인구도 20여 명이 넘어서고 있다는 최신 뉴스도 간간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날 출근길에도 나는 종종 시쳇말을 나누던 직장 상사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바이러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따분한 출근 시간을 죽였습니다. 중국에서는 그 바이러스 때문에 엄청 많은 사람이 죽나 봐요, 사망자들은 모두 합병증이 있었대요, 아 참, 마스크는 구하셨어요? 모 대기업은 재택근무 시행한다는데, 우리는 안 하나, 따위의 말들 말입니다. 그렇게 도착한 역사에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예방 수칙’을 설명하는 안내문이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 그리고 일어 방송이 들려왔습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지하철 속 인파 속에 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어를 듣고 있자면 지금 내가 겪는 이 상황이 생경해져 왔습니다. 그리고 묘하게 불안감을 느꼈고, 그 뒤에는 무기력함이 따라붙었습니다.

 사무실로 출근하니 몇몇은 이미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디자인 팀에서는 몇 주 전에 임신한 아내가 있는 대리님과 며칠 전부터 기침을 자주 하시는 과장님이 그중 두 명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부장님은 화상 회의에서도 마스크를 쓰는 것 아니냐며 농담을 건넸지만, 그다지 유쾌한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포근한 추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던 2020년 1월, 나는 한 달 뒤에 있을 전시회 준비에 한창 열을 내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하면 매일같이 작업실로 향해 전시회에 올릴 책과 포스터 작업을 하면서요. 그날도 나는 영등포구에 있는 작업실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습니다. 대림역에서 출발한 1호선 열차는 다음 역인 영등포역으로 달렸습니다. 이미 몇몇 기업의 발 빠른 재택근무 시행으로 한산해진 열차 안에는 평소와 달리 빈자리가 많았습니다. 내가 좌석에 앉고도 반대편 좌석에 사람이 없어 차창 너머의 풍경이 훤히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자리에 앉아 책을 펼쳤습니다. 군대에 있는 친구가 지난번 휴가를 나와 빌려준 <데미안>이었습니다. 오랜만에 탄 1호선 열차가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읽던 책에 갑자기 든 햇볕에 놀라 나는 고개를 들었습니다. 창밖 풍경은 차갑고 맑아 보였고, 열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는 너무 선명해서 지하철이 아니라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느낌이었습니다.


 영등포역에서 내리자 맨발인 채로 지하철역 앞 벤치에 앉은 남자가 역 플랫폼에 모인 비둘기에게 빵 조각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사람이야.’

 나는 생각했습니다.

 역을 나와 버스 정거장으로 향해, 마을버스를 탔습니다.

 마을버스 안에 부착된 TV 화면에서는 유명인이 출연해 ‘신종 코로나 예방 수칙’에 대해 안내하는 영상이 나왔습니다. 손 씻기, 마스크 착용, 물 마시기. 사람을 죽이는 바이러스에 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대응이 너무 작아 허탈해진 나는 출근길에서와 같이 또 한 번 불안함과 무기력함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두 부정적인 감정이 우울함이 되어 내 감정을 낚아채는 횟수가 늘어났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전염병에 대한 우울함은 나만 느낀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전문가들이 이 감정에 대해 ‘코로나 블루’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알게 된 것은 후의 일입니다.


 ‘지금 우리 사이에서 유행하는 전염병은 잠깐 지나가는 국제적 이슈일까? 아니면 세계적 공황의 시작일까?’

 나는 버스에서 내리며 마스크를 눈 밑까지 올려 쓰고 불길한 예감을 무시하며 작업실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다시 떠올려보면 그날은,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COVID-19라는 병명 대신 모두가 임시 병명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말하던 세 달 전부터 우리는 마스크를 달고 살고, 평소보다 손을 더 자주 씻고, 외부활동을 삼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비일상이 점점 일상의 자리로 비집고 들어오던 때를 기억하시나요? 저는 그때도 마스크가 답답하다는 볼멘소리를 내며 그 비일상들을 마음으로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소식을 접한 지 네 달이 다 되어가는 요즘, 저는 여전히 작업실 월세가 아까워서 서울 도심으로, 친구 근황이 궁금해서 서로 위치의 중간 지점으로, 햇살이 좋아서 집 앞으로 외출합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들어가는 SNS에서 많은 이들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연대하는 것을 보고 죄책감을 느끼며, 저 스스로 파놉티콘에 갇혀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르바이트에서 해고당한 지인의 소식과, 소상공인 비상 대출을 받으러 아침부터 장사진을 치는 자영업자에 대한 뉴스를 접하며 외람되지만 안타까워하고, 휴대폰에 계속 울리는 긴급재난 알림과 쇼핑몰 마케팅 푸시 알람에 피곤해합니다. 또 본분이 애매해진 학생들이 SNS에 기하급수적으로 올리는 다양한 챌린지들을 감흥 없이 보고 넘기면서, 마스크 뒤에서 제 일상을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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