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공주 내러티브의 모순과 상업주의의 함정
최근 디즈니의 공주 캐릭터들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내러티브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실사 영화로 만들어진 <알라딘>에서는 자스민 공주가 기존의 순종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여성의 권리와 주체성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그녀는 “왜 여자는 술탄이 될 수 없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며, 전통적 권력 구조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제 막 개봉한 <백설공주> 역시 실사영화 백설공주도 혁명을 원하는 것처럼 묘사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마치 공주가 스스로 억압된 상황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것처럼 그려지곤 하지요.
https://youtu.be/UHwJFkfqaaI?si=_MuZ9JAeju8oMiO4
하지만 이 내러티브는 어딘가 어색합니다. 왜냐하면 공주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 권력과 특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공주’라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이미 특권층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특권층이 억압받는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혁명을 원한다는 설정은 모순에 가깝습니다. 쉽게 말해, 왕족이면서도 혁명을 노래한다는 건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습니다. 알라딘에서 자스민이 “왜 여자는 술탄이 되지 못하느냐?”라고 묻는다면, 같은 논리로 알라딘은 왜 술탄이 될 수 없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따라옵니다. 알라딘은 공주와 사랑을 이루기 위해 권력을 손에 넣으려 하지만, 공주는 권력을 가지고도 또 다른 권력을 주장합니다.
이와 같은 극단적이고 모순적인 내러티브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원인이 오염된 상업주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디즈니는 과거의 작품들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가치와 메시지를 담아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철저히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옛 추억을 기억하고 싶은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내러티브를 강제로 덧붙이려는 시도는 결국 어색한 혼합물이 되고 맙니다. 원래의 이야기에서 혁명과 공주라는 개념은 함께 있을 수 없는 반대 지점에 있습니다. 하지만 디즈니는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 둘을 억지로 맞붙이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진정한 혁명은 거창한 선언이나 고귀한 출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애니메이션 <주먹왕 랄프>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공주 바넬로피는 다시 즉위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공주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서로 평등하게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장면은 혁명을 이루는 방식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혁명이란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실천은 결코 특권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지요.
결국, 디즈니의 공주들이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혁명은 권력의 진정한 해체나 변화가 아닌, 기존의 틀 안에서 새로운 위치를 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디즈니는 더 나은 세상과 주체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주체성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깊이 고민하지 않는 듯합니다. 단지 현대의 가치와 요구를 반영하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자기모순을 낳고, 그 모순은 대중에게 혼란과 피로감을 안겨줍니다.
디즈니가 공주를 통한 혁명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그려내고 싶다면, 권력의 문제를 제대로 직시해야 합니다. 혁명이란 특권을 내려놓고 더 나은 가치를 위해 실천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혁명을 담아내지 못한 채, 단지 현대의 트렌드를 반영하기 위해 억지로 설정된 공주들의 이야기들은 그저 상업주의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으로 보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