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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LK May 08. 2017

처참한 패배, 그리고 신화가 되다

스페인 내전 (1936-39)

제가 작년 가을쯤 아옌데 전기를 소개하면서 스페인 내전의 역사에 관한 좋은 번역서를 소개하겠다고 약속드린 적이 있습니다. 좌파가 처참한 패배를 당했지만, 역사의 기억을 둘러싼 전쟁에서 승자가 된 흔치 않은 경우라고 말씀드렸었죠. 해를 넘겨서 이제서야 책 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앤터니 비버,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The Battle for Spain: The Spanish Civil War 1936-1939>, 김원중 역 (교양인, 2009) 입니다.

          사실 스페인 내전은 유럽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주제입니다. 아예 이 전쟁의 존재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도 많이 계시죠. 이 시기 유럽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독보적인 사건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국 대중의 기억에서 한국전쟁이 차지하는 위치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미국에서 한국전쟁이 베트남전에 가려져 “잊혀진 전쟁”이라면, 한국에서 스페인 내전은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 가려져 잊혀진 전쟁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스페인 내전은 2차 대전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고, 이 전쟁을 이해해야 우리는 2차대전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스페인 내전은 20세기 유럽현대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왜 그럴까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유럽에 출현한 이후, 20세기 전반부의 유럽은 정치 이념들간의 극한 대결장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유럽을 지배했던 이념을 거칠게 세 가지로 요약한다면 리버럴 민주주의 (Liberal Democracy), 공산주의, 그리고 파시즘을 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 스펙트럼에는 수많은 다양한 이념들이 겹쳐 있었지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유럽 국가들에서 광범위하게 관측되는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공포”입니다. 자국이 또 다른 소련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는 중도 우파들로 하여금 좌파와의 협력을 꺼리게 만들었지요. 즉 권위주의 체제인 파시즘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면 차라리 파시즘을 용인하는 것이 공산주의가 만연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 당시 유럽 우파들 (특히 소유권에 민감한 부르주아와 자유주의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었습니다. 게다가 대공황 이후 유럽이 정치∙경제적인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폭력 통제와 질서 유지에 실패하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이러한 시각은 더욱 강화되었죠. 특히 자생적인 민주주의 제도가 깊게 뿌리내리지 못한 국가들에서 이 현상은 더욱 폭넓게 나타납니다.

          스페인 내전은 바로 이러한, 우파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대규모로 폭발하며 프랑코 장군을 필두로 군, 가톨릭교회, 우파가 연합하여 1936년 좌파 공화정부를 공격하며 시작된 전쟁입니다. 공화정부가 이 쿠데타를 초기에 진압하는 데 실패하면서 결국 이 충돌은 내전으로 격화되지요. 물론 저자인 앤터니 비버에 따르면, “1936년 합법적으로 집권한 좌파 공화정부는 아무 잘못이 없으며 우파 국민진영(Nationalist)의 불법적인 쿠데타에 희생당했다”는 식의 서술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좌파 공화정부가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한 정부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당시 스페인에서 좌파도 역시 “우파 못지않게 자주 민주 절차나 법의 지배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 비버의 해석입니다 (11쪽). 좌파 지도자들도 만약 선거에서 우파가 승리한다면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며 공공연히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녔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왜 스페인의 좌파 공화정부는 이 내전에서 패배했을까요? 패배의 원인은 크게 공화정부 외부, 즉 국제적 요인과 공화정부의 내부적 요인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국제적 요인은 사실 스페인 내전과 2차 대전과의 관계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내전이 발발하자 서구의 리버럴 민주주의 강국인 영국-프랑스-미국은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미국은 고립주의적인 대외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에 유럽 문제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으려 했고, 현실적으로 이 전쟁을 국제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영국과 프랑스 뿐이었죠. 당시 프랑스의 집권정부는 사회주의 좌파연합 정부였고 따라서 초기에는 스페인의 좌파 공화정부를 도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이 분쟁이 유럽 전역으로 번지게 되면 또 다른 대전이 발발할 것이라 여겼고 프랑스에 절대로 스페인 내전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합니다. 당시 프랑스는 나치 독일이 또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에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영국과의 사이가 틀어져서 영국이 유럽 방어에 손을 뗀다면, 프랑스는 혼자서 독일의 위협을 감당해야 했지요. 프랑스로서는 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불간섭 위원회”를 조직한 뒤, 스페인 측 어떤 진영에도 무기를 공급하거나 지원을 하지 말 것을 결의합니다.   

          그러나 이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개입 의도를 분쇄하지 못합니다. 이미 스페인 내전을 파시즘 선전장이자 재무장한 자국 무기들을 실험해 볼 장소로 여겼던 두 나라는 스페인 국민진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요. 물론 1차 대전의 상흔이 너무나 강력해서 영국과 프랑스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대전의 재발을 막으려 한 것은 이해할 법 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당한지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두 나라는 도저히 그같은 규모의 전쟁을 또 감내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불간섭 위원회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개입을 막지도 못하면서 결국 “합법적으로 들어선 공화 정부에는 무기 제공을 금하고, 반란 세력에게 무기가 들어가는 것을 모른 체”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247쪽). 즉 “국민군은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게 된 반면, 공화 정부군은 민주주의 국가들로부터 무기를 제공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는 겁니다 (255쪽). 게다가 미국은 대외적으로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미국 기업들의 석유와 자금은 끊임없이 국민군으로 흘러들어갑니다.

          고립무원에 처한 공화진영을 도와준 것은 소련과 멕시코였습니다. 물론 소련이 순수한 “좌파적 동지애”에서 공화진영을 도왔다기보다는 유럽 전역에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전략적 의도로 도왔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겠지요. 그러나 소련의 지원은 결국 공화진영의 패배의 두 번째 요인이자,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인일 수 있는 내부적 분열에 기여하게 됩니다. 소련이 공화진영에 보낸 무기의 양과 질이 형편없었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공산주의자들의 파벌주의”는 공화진영의 결속을 갉아먹고 내부의 붕괴를 이끌게 됩니다. 이들은 “무기를 자기편인 공산주의자들만 사용하게” 하거나 “탄약을 지급받기 위해” 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종용하기도 합니다 (280쪽). 공화진영 내부는 공산주의자들과 비공산 좌파들간의 불화와 알력으로 도저히 하나의 군이자 진영으로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갑니다. 당시 의용군으로 참전했던 영국의 사회주의자 문인 조지 오웰도 참전 경험을 다룬 자신의 저서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이 개탄스러운 분열상을 잘 묘사하고 있지요.

소련 군사 고문들과 스페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스탈린식 편집증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당한 모든 패배를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음모나 ‘제5열’ 탓으로 돌렸다. 앞뒤가 바뀐 이론이 날조되었고, 무고한 장교와 병사들이 체포되어 총살되었으며, 거의 정신이상에 가까운 기만을 보여주는 보고서가 모스크바로 보내졌다. 공화군의 사기가 절망적이라고 할 정도로 저하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734-735쪽).

이런 점을 보면 내전이 결국 공화정부의 처참한 패배로 끝난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파 국민진영은 내부적으로 확실한 결속을 유지했으며 외부적으로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얻어내는 동시에, 공화정부를 지원할 수 있는 잠재적 적국인 영국-프랑스-미국을 모두 불개입 정책에 묶어두는 데 성공했던 것이지요.

          국제사회의 여론은 1937년 피카소의 그림으로 유명한 게르니카 폭격을 분기점으로 공화진영에 동정적으로 돌아섰지만, 이미 이때가 되면 공화정부는 "전쟁에서 패배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160쪽). 파시즘보다는 공산주의의 발호를 염려했던 영국-프랑스-미국의 정치가들은 내전이 공화정부의 궤멸로 끝날 것이 확실해진 1938년에서야 “공화정부의 소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유럽 대륙에 남아있는 민주주의 국가는 프랑스, 스위스, 저지대 국가들 (베네룩스 3국),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하여 이제 몇 나라 되지 않았다. 심지어 비관론자들도 이들 민주주의 국가들마저 18개월 후면 대부분 사라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여러 외국 정부들은 스페인에서 종전을 중재하려고 시도했으나 프랑코는 모두 거절했다 (645쪽).

그리고 이 상황에서 1938년 9월의 뮌헨 협정은 마지막 결정타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하면서까지 독일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면서 전쟁을 막아보려 했고, 이 와중에 스페인 문제는 이제 가망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지요.

영국과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나치 독일의 위협이 점차 가시화되고, 유럽에서 전쟁 가능성이 고개를 드는 상황에서 군대나 무기를 다른 데로 분산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공화 정부라고 하는,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지고 궁핍하기 짝이 없는 동맹 세력보다는 프랑코가 지배하는 중립국 스페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669쪽).

          내전이 공화진영의 참혹한 패배로 끝난 1939년, 유럽은 또 다시 대전에 휘말리게 되고 스페인은 중립을 지켰지만 프랑코의 파시스트 독재 치하에서 36년을 보내게 됩니다. 비버도 인정하듯이, 좌파나 우파나 똑같이 내전을 일으키겠다고 선동하고 민주적∙법적 질서를 지킬 의도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테러와 학살의 강도와 규모는 단연 우파 국민진영이 좌파 공화진영을 압도했습니다. 이들의 전략 핵심은 ‘정화(淨化, limpieza)’ 개념으로, “좌익 분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원, 프리메이슨 등을 모조리 근절”하는 것이었습니다 (171쪽). 비버는 공식 집계에서 누락된 희생자와 아직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지역들을 제외해도 대략 8만 명, 그 수치를 포함시키면 내전 기간과 그 이후의 독재 체제 치하에서 국민진영에 의해 살해되고 처형당한 사람은 20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국민진영의 장군 중 하나인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의 협박은 실로 순수한 공포를 느끼게 합니다.

나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이 우리 편 1명을 죽이면 우리는 적어도 너희들 10명을 죽일 것이다 (182쪽).

          책 자체가 본문만 74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기 때문에 역사 교양서로도 쉽게 접근하기 힘든 책임은 분명합니다. 저자인 비버가 전쟁사 전공인지라 굉장히 디테일한 전투, 전략 묘사도 꽤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쪽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좀 어려움을 느끼실 수도 있고요 (저 역시 이 부분들은 쉽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당시 사회와 문화를 접목시키는 군사사(Military History)와 달리, 구체적인 전투 자체의 묘사에는 그다지 흥미도 없고 문외한이니까요). 하지만 현재 한국어로 접할 수 있는 스페인 내전 역사서 중에서 이 책에 비견될 만한 책은 없는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이 책이 저에게 각별한 이유는 제가 예전에 한 번 글에서 언급했던 마크 마조워Mark Mazower의 <암흑의 대륙: 20세기 유럽 현대사>, 그리고 토니 주트Tony Judt의 <포스트워, 1945-2005>와 함께 20대에 제 정치적 지향을 결정한 중요한 세 역사서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포스트워>도 조만간 꼭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좌파 공화진영의 처참한 패배는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저에게 던졌고, 저의 정치적 지향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명분에서 앞서고도 결국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공화진영 정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외부적 요인도 있었지만 결국 좌파진영이 하나로 결속하지 못했던 것은 가장 결정적인 패배의 요인이었고요.

          여기 시간으로 이틀 뒤면 있을 고국의 대통령 선거와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결국 선거도 “정치적 전쟁”의 연장선입니다. 물론 정치의 모든 것을 극한 진영논리와 대결의 장으로 모는 것은 지양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결국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경쟁이고 이 경쟁에서는, "불법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반드시 이겨야 정치권력을 획득하여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페인 내전은 한국의 좌파와 우파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좌파진영은 민주주의 체제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정치권력을 획득해야 이 사회를 조금이나마 진보된 사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자신들만이 “참된 진보”라고 외치며 모든 종류의 정치적 타협을 “변절”로 몰아세운다면, 진보는 결코 쉽사리 올 수 없을 겁니다. 우파진영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정을 부정하고 민주주의 원리를 대놓고 공격하는 파시스트들과 확실하게 절연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스페인 내전 당시 유럽의 우파들처럼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에 눈이 멀어 결국 파시즘에 먹혀버리게 될 것입니다. 지난 10월부터 이어진 고국의 상황은 결국 공화국의 헌정과 민주주의를 정상으로 되돌리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이틀 후, 이 움직임이 올바른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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