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읽었습니다
미국이 파리기후협정을 탈퇴한 직후, 6월 2일 영국 신문 가디언Guardian 지에는 “What’s 76 years old and finished? The American century!”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신문은 1941년, 미국이 고립주의를 벗어나 2차대전에 참전할 것을 촉구하는 타임Time 지의 사설로부터 “미국의 세기”가 시작되고 전후 국제질서가 규정되었다면, 이제 그로부터 76년 후, 그 미국의 세기가 파리협정의 탈퇴로 종말을 고했다고 본 것이죠.
왜 미국은 이런 선택을 했을까요?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줄 수는 없겠지만, 그 역사적 맥락을 가늠할 수 있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미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 (1963)는 제가 작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에 사서 읽었던 책입니다. 여론조사와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일거에 뒤집은 충격적인 결과이기도 했고, 새 행정부 치하의 미국 사회 곳곳에서 리버럴의 가치가 흔들리는 모습은 저로 하여금 도대체 이런 사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했습니다. 그 때 생각난 책이 이 책이었는데요. 저자인 리처드 호프슈태터Richard Hofstadter (1916-1970)는 미국 정치-지성사 분야의 권위자로서 이 책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그의 다른 책인 <미국 정치의 편집증적 스타일The Paranoid Style in American Politics> (1965)을 프랑스 월간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Le Monde Diplomatique 紙에서 소개한 글도 읽은 적이 있어서 좀 친숙하기도 했고요.
미국 정치와 사회의 기괴한 면을 다룬 두 책이 1960년대에 출간되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겠지요. 1950년대의 매카시즘 광풍은 호프슈태터가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집필하게 된 주요한 동기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반지성주의라고 부르는 태도와 생각을 하나로 묶는 공통적인 요소가 바로 “지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 그들의 삶, 그들의 정신에 대한 분개와 의심,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러한 삶의 가치를 축소시키려 하는 기질”이라고 정의합니다. 호프슈태터는 여러 사례를 들면서 미국 사회에 이러한 태도가 “지배적” (dominant)이지는 않지만, “만연해” (pervasive)있다고 지적하지요. 그 중에서 “지성”(intellect)과 “지능”(Intelligence)의 대조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지능은 언제나 찬사를 받지만, 지성은 불신과 의혹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호프슈태터는 미국인들이 에디슨의 “창의적인 기량” (inventive skills)은 추앙하지만, 정작 “순수 과학” (pure science)에서의 업적들에 대해서는 에디슨의 것만큼 찬사를 보내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러한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의사∙변호사∙엔지니어 같은 “정신 노동자”들은 지성 (intellect) 또는 지식인 (intellectual)과 연계되지 않습니다. 지성과 지식인을 구성하는 요소와 자질들은 바로 “자유로운 사고” (free speculation)와 “급진적 비판” (radical criticism) 같은 것들이라는 점인데, 이러한 것들은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호프슈태터는 이러한 미국의 반지성주의가 1950년대에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며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반지성주의는 “신화적” 영역으로까지 격상되었다는 것이죠. 반지성주의 담론에서 지성은 미국 사회의 "본질적" 가치인 - “따뜻한 감정”, “실용”, “민주주의”, “평등” - 과 대립되는, “교활하고 사악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호프슈태터는 미국 역사에서 이 반지성주의에 영향을 준 요소를 크게 세 가지로 봅니다. 첫째로, 미국 기독교의 복음주의(evangelical) 운동입니다. 개인의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복음주의가 18세기 영국에서는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비롯한 기존 기독교 종파의 조직과 제도의 영역 안에서 융성해졌던 것과 달리, 미국에서 복음주의는 기존 조직과 제도의 범위를 넘어서거나 혹은 그것들을 약화시키며 발전하게 됩니다. 즉 미국 사회에서 종교는 처음부터 반권위를 표방하며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이 점은 프리미티비즘Primitivism이라고 불리는 미국 초기 정착민들의 정서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유럽 문명은 지나친 “교양”과 “세련” 탓에 “퇴폐적”으로 변질되었다고 여겼고, 따라서 미국을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난 “자연”의 세계, 즉 초기 기독교회의 순수성이 부활할 수 있는 곳이라고 보았던 것이죠.
둘째로, 미국이 “사업가 혹은 기업가적”인 사고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라는 점입니다. 호프슈태터는 19세기에 미국을 기행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저서를 남겼던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문필가인 토크빌Tocqueville도 이를 꿰뚫어보았다고 지적합니다.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지식인은 “남성적인” 기업가적 세계와 관계가 없는, “고립되고” “여성적인”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프레임을 구축하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특징은 세 번째 요소이자 미국 사회에 만연한, 공격적인 “평등주의” (egalitarianism)와 연결됩니다. “보통 사람들” (the common man)로 일컬어지는 평범한 시민들 (ordinary citizens)의 지적 능력만으로도 정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 이상의 학식과 교육은 “쓸모없는 귀족적 특권의 잔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 사회가 건국 초기부터 유럽과는 달리 상당히 평등한 시민들의 공동체로 시작했다는 점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에서 결국 지식인과 지성은 바로 이러한 평범한 사람들의 평등주의적 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러한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는 193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극우적 이데올로기와 결합하게 되어 “공산주의와 지식인 공동체 간의 연계” 라는 프레임을 만들게 됩니다. 이 프레임은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에 중요한 연료가 되지요. 그리고 호프슈태터는 매카시즘으로 폭발한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20세기 초반의 진보주의(Progressivism) 운동과 뉴딜New Deal의 성과를 부정하고, 바로 1914년 이전의 미국 - 고립주의, 촌락 중심의 (도시가 아닌) 사회, 개신교, (규제받지 않는) 산업 자본주의 등으로 상징되는 - The Older America로 회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라고 정의합니다.
파리기후협정을 탈퇴하고 이제 자국만을 위해서 움직이겠다는 미국의 모습, 그리고 새 행정부 치하에서 리버럴적 가치를 포기하고 퇴행하는 미국의 모습이 앞서 말한 The Older America의 구성요소와 많이 겹쳐지지 않나요? 그리고 미국 반지성주의의 세 가지 요소를 잘 곱씹어본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국 동부와 서부 해안가의 리버럴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른, “또 하나의 미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 또 하나의 미국이 바로 새 행정부 출범을 이끌어 낸 포퓰리즘의 주요 기반이었죠. 호프슈태터가 정의한 고립주의, 촌락 중심의 사회, 개신교, 산업 자본주의 등으로 일컬어지는 The Older America는 지금 미국 행정부가 지향하는 미국과 꽤 닮아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저의 가정이 어느 정도 맞다면, 제가 서두에서 언급한 가디언 지의 분석은 일리있는 것일 겁니다. 미국이 고립주의를 포기하고 국제적인 책임감을 분담함으로써 (혹은 짊어지면서) 미국의 세기가 열렸다면, 이제 그것을 포기한 이후, 미국의 세기라는 말은 점차 유명무실하게 되겠지요. 이는 아마 미국이 이제 제국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겠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작년만 해도 이 책의 한국어 번역본을 찾을 수 없었는데 올해 5월 이 책이 드디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것 같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보다 쉽게 접하실 수 있겠네요. 더불어 저자의 다른 책인 <미국 정치의 편집증적 스타일>도 조만간 번역되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