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더 크라운>과 영화 <더 퀸>이 그리는 엘리자베스 2세의 삶
앞으로 한 세기 이후에도 왕정은 정치체제의 하나로서 존속할 수 있을까요? 공화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이 질문은 애초에 필요없는 것일테지요. 그러나 지금도 엄연히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왕정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자신과 후손들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꽤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른바 민주주의 공화국이 일종의 보편적인 정치체제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금, 왕정은 입헌군주제라는 형식으로 민주주의 체제에 적응하며 살아남았지만, 이제는 “구시대의 산물”로 여겨지며 장기적으로는 점차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죠. 현재로선 왕정 국가가 세계지도에서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더 늘어날 가능성은 그리 높아보이지 않습니다.
2006년작 영화 <더 퀸The Queen>과 넷플릭스의 2016년 드라마 <더 크라운The Crown>은 “왕정, 더 좁혀보자면 왕실은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영국 왕실을 소재로 풀어낸 작품들입니다. 영국이란 나라가 갖고 있는 역사적인 영향력과 위상 덕택에 영국 왕실은 사람들이 흔히 “왕실”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아직 유럽에서 적지 않은 나라들이 왕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영국 왕실만큼의 인지도와 영향력을 갖고 있지는 않죠.
이 드라마에 관심이 갔던 이유는 영화 <더 퀸>이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 제작의 촉매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더 퀸>의 각본가인 피터 모건Peter Morgan이 프로그램 제작을 맡았다는 점도 그렇고요. 19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갑작스런 죽음에 아무런 성명 발표도 없던 영국 왕실에 대해 영국 국민들의 여론이 싸늘해져가고, 심지어 왕정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까지 높아지자 당시 수상이었던 토니 블레어가 영국 왕실을 설득(압박도 병행했겠죠)하여 여왕의 공식적인 추도문 발표를 이끌어냅니다. 그 후 여론은 진정되었고, 영국 왕실은 지금까진 별 탈 없이 유지되고 있지요. 이 이야기를 그려낸 것이 바로 <더 퀸>입니다. 당시 영국 국민들이 영국 왕실, 특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해 품었던 불만은, 아무리 이혼한 며느리이고 공식적으로 왕실 일원이 아니라고 해도, 두 손자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했는데 어떻게 여왕이 아무런 말도 없을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국민들에게 이런 여왕의 모습은 인간적으로 너무 비정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죠.
왜 여왕은 이 사태에 침묵을 지켰던 것일까요? <더 퀸>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저도 <더 퀸>을 보지 못했던 터여서, 이번에 <더 크라운> 1시즌을 보고 바로 <더 퀸>을 보았습니다. 이 드라마와 영화를 동시에 교차해서 보게되니 굉장히 흥미롭더군요. 간단히 말하자면 <더 크라운>은 <더 퀸>의 질문을 더욱 확장한 작품입니다. “<더 퀸>의 그 여왕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엘리자베스 2세의 삶의 여정을 거슬러 추적하는 것이죠.
<더 크라운>은 1952년 엘리자베스가 투병 중이던 아버지 조지 6세를 대신해 정기적인 영연방 순회를 위해 케냐에 간 사이, 아버지의 부고를 접하고 새 국왕이 되어 영국으로 급히 귀국하는 시점부터 시작됩니다. 이 순간부터 엘리자베스는 “어떻게 군주로서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지요. 그리고 이 질문은 바로 동시에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군주’로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과제와 연결됩니다. 정치적 실권없이 국민적 상징으로만 기능하는 입헌군주제의 군주는 이제 점점 더 현대화되는 사회에서 자신과 왕실의 존재가치를 국민들에게 납득시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죠.
바로 이 점이 <더 퀸>과 <더 크라운>을 연결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더 퀸>의 말미에 엘리자베스는 블레어에게 자신은 “사사로운” 감정은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담아두게끔 배워왔다고 합니다. “의무가 먼저이고, 내 자신은 그 다음이다” (Duty first, self second) - 이 말이 바로 자신이 국왕으로서 임해왔던 자세였다고 하지요. 그리고 국민들도 그런 국왕을 기대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바로 <더 크라운>에서 25세의 나이로 국왕이 되어 귀국하는 엘리자베스에게 할머니인 메리 왕대비 (조지 5세의 왕비이지요)가 편지로 건네 준 조언과 맞물립니다. 할머니 메리는 “사사로운 개인적 방종”(personal indulgence)과 의무를 엄격히 구분하지 못하여 결국 스스로 군주제를 파멸로 몰아넣은 왕들을 수없이 봐왔다며 절대 그런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고 하지요. 메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엘리자베스 마운트배튼”(Mountbatten, 엘리자베스의 부군인 필립 공의 성입니다)이라는 사람은 이제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Regina)이라는 또 다른 “엘리자베스”로 교체되었다고 말하며, 이 “두 개의 엘리자베스”는 끊임없이 충돌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단호한 명제를 덧붙이지요 - “여왕이 언제나 그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The fact is, the Crown must win. Must always win.) 철저하게 사적인 감정을 감추고 군주라는 지위에 부합하는 절제된 언행만을 드러내게끔 배워온 여왕에게 다이애나의 죽음은,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처럼, 철저하게 속으로만 삭혀야 하는 사건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군주로서의 책임감과 의무는 엘리자베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군주로서 대면해야 했던 자국의 현실과도 연결됩니다. 이미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세계의 패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갔고, 영국은 두 차례의 대전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영 제국의 쇠퇴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더 크라운>은 전후 영국의 식민지에서 점차 민족주의 감정이 거세지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엘리자베스는 강행군임에도 불구하고 영연방 순회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지요. 어떻게든 제국이 해체되는 것은 막아보려는 시도였을 겁니다. 아버지 조지 6세가 애초에 형이었던 윈저 공 에드워드가 이혼녀와의 결혼을 위해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국왕이 될 일이 없었던 것처럼, 엘리자베스 역시 마찬가지였겠죠. “개인적인 행복”이라는 가치도 중요하지만, “개인적 감정” 때문에 왕위를 저버린 사례가 바로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철저히 영 제국의 군주라는 책임과 의무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것이 20세기 후반에 왕정의 존속을 보장해주는 길이기도 했고요. 영화 <더 퀸> 후반부로 갈수록 블레어가 엘리자베스 여왕이 국가의 군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 평생을 노력해왔다는 점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더 퀸>을 재미있게 보신 분들이라면, <더 크라운>을 꼭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혹시 <더 크라운> 1시즌을 보신 분들 중 영화 <더 퀸>을 아직 못본 분들에게는 영화를 꼭 보시라고 추천해드리고 싶고요. 두 작품은 여러모로 연결지을 수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또한 전후 영국 현대사를 “여왕, 그리고 왕실”의 시선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것도 <더 크라운>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인기가 없으면 조기종영될 수도 있어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드라마의 인기가 꽤 높고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해서 애초에 계획한대로 대처 집권시기나 블레어 집권 바로 직전까지 그릴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다음달 초에 2시즌이 방영될 예정이고요. 과연 엘리자베스 여왕, 그리고 영국 왕실은 “대영제국”이 미국과 소련에 밀려나고 경제적인 위기까지 겹치며 유럽의 환자로 점차 쇠락해가는 과정, 그리고 여전히 그 성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대처 집권 이후 경제위기를 극복하며 독일-프랑스와 더불어 유럽을 이끌어가는 3대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물론 브렉시트 이후 이 표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지만요)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무척 기대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더 크라운>, 특히 <더 퀸>이 최근 우리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국민들의 뜻을 확인하고 난 뒤에 결국 수상의 조언대로 TV 생중계로 공식성명을 발표하고 조의를 표한 부분입니다. 물론 여왕이 왕정의 존속을 위해 마지못해 이런 선택을 내렸다고 볼 수도 있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왕이 그런 정치적 선택을 할 줄 알았다는 점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 혹은 대중의 여론이 설령 옳지 않을 수는 있어도, 최소한 여론에 반응하는 모습마저 보이지 않고 끝까지 그것에 대적하여 정치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 지도자는 없습니다. 한 두번은 여론을 무시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행태는 점차 적립금처럼 쌓이게 되고 결국 파멸을 불러 오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그 점에서 현명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입헌군주제 하에서 국민 다수의 뜻을 거슬러서는 군주는 결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여왕은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것이죠. 민주주의의 원칙과 생리를 잘 아는 정치 지도자라면 국민 다수의 뜻이 특정 사안에 대해 No를 외친다면, 일단 그 뜻을 받아들인 뒤 그것을 어떻게 하면 국가이익에 유리한 방향으로 견인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