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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LK Dec 18. 2017

테러범의 언어와 인생

<Manhunt: Unabomber>를 보았습니다

1990년대 국제뉴스를 눈여겨 보셨던 분들이라면 미국의 "유나바머" (Unabomber) 사건을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저도 이 사건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요, 2001년의 테러 이전에는, 168명의 사망자를 낸 1995년 오클라호마 시티의 연방정부 청사 건물 폭탄테러와 더불어 미국 대중들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던 테러일 겁니다. 본명인 시어도어 카진스키Theodore Kaczinsky보다도 당시 FBI와 미디어가 붙인 별명이었던 유나바머로 더 잘 알려진 이 테러범은 1978년부터 1995년까지 미 전역에 우편물로 위장한 폭탄을 배송했고, 이 기간 동안 총 사망자 3명과 부상자 23명이 발생했습니다. 주요 표적이 항공사나 대학교, 또는 그 기관 직원이었기 때문에 University와 Airline - 이 두 글자를 합성하여 Unabomber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죠.

          이 사건이 유명해진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무려 18년 동안 범인을 잡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연속된 범행에도 불구하고 연쇄살인범이라기보다는 테러범이라고 불리기에 적합한 범행 의도와 수법, 마지막으로 범인이 고학력 엘리트였다는 점입니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2017년 8부작 미니시리즈 드라마 <맨헌트: 유나바머>는 이 특이한 요인들에 집중하며 FBI의 신참 프로파일러 제임스 피츠제럴드가 유나바머를 추적해가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8부작 미니시리즈여서 그런지 작품의 밀도나 만듦새가 탄탄하고 주연배우인 샘 워싱턴Sam Worthington과 폴 베타니Paul Bettany의 연기도 아주 훌륭합니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빅 역을 맡았던 크리스 노스Chris Noth를 보는 것도 반갑기도 하고요. 제가 커버 이미지에 사용한 드라마의 인트로 화면도 무척 인상적입니다. 유나바머가 은둔하며 폭발물을 제조한 오두막과 그가 주요한 범행수단으로 사용했던 우편소포를 겹쳐서 보여주고 있지요.

           피츠제럴드는 FBI 수사팀 수뇌부가 유나바머를 기계 직종에 종사하는 저학력 비숙련공으로 본 것과 달리, 그가 고학력 엘리트라는 점을 가장 먼저 포착합니다. 피츠제럴드는 유나바머가 일반적인 연쇄살인범과 달리 피해자를 “사람”으로 “대면”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피츠제럴드가 피해 현장을 답사하며 되뇌이는 말처럼, 유나바머에게 피해자들은 일종의 “상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는 또한 유나바머가 우편을 이용한다는 점도 눈여겨 봅니다. 유나바머가 범행을 통해 지속적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추론한 것입니다. 테러의 정의를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벌이는 조직적인 폭력행위로 한정한다면, 유나바머의 범행이야말로 테러의 정의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유나바머가 일종의 개인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고, 이 범행을 통해 그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다는 피츠제럴드의 가설은 유나바머가 <산업사회와 그 미래 Industrial Society and Its Future>라는 제목의 자필 선언문을 출판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사실로 드러납니다. 유나바머는 그 선언문을 유력 일간지에서 출판해주지 않으면 계속해서 테러를 일으킬 것이라 협박하지요.

          이 지점에서부터 이 테러의 독특함, 그리고 드라마가 파고드는 부분이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도대체 유나바머가 누구인지도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는 교착상황에서, 피츠제럴드는 유나바머가 범행 당시 신문사에 보냈던 편지와 그의 선언문을 대조하며 언어학적인 분석을 합니다. 이른바 비교 언어학적 분석 (Comparative linguistic analysis)을 통해 법의학적 증거 (forensic evidence)를 입수하려 하는 것이죠. 처음에는 유나바머가 analyze, skilful 같은 미국식 또는 현대영어를 쓰지 않고 analyse, skilfull 같은 영국식 또는 고어체 영어를 쓰는 점부터 시작하다가, 문법적∙논리적으로 부정확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영어에서 그대로 통용되는 속담 문장을 오히려 정확한 표현으로 바꿔서 쓰는 것까지 포착하기에 이릅니다. 예를 들어 “케이크를 먹으면서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 즉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다는 뜻의 속담인 “You can’t have your cake and eat it” - 이 표현은 “You can’t eat your cake and have it”으로 바꿔써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되지요. 그렇지만 후자는 현대영어에서 잘 쓰이지 않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바로 유나바머는 자신의 편지와 선언문에서 이 후자의 표현을 지속적으로 썼던 것이죠.

          그렇지만 중대한 문제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언어” 말고는 아무런 물적인 증거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후반부에서 영장 담당 판사가 이야기하듯이 - “I couldn’t find a single precedent for this kind of argument in all of western legal history” - 이것은 법학사에서 전례가 없었던 증거라는 겁니다. 게다가 대체 “누가” 유나바머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과연 언어학적 분석만으로 법정 증거를 끌어낼 수 있는가? 그리고 이것만으로 유나바머의 정체를 어떻게 밝혀낼 것인가? 이 두 가지 큰 문제가 피츠제럴드, 더 나아가 이 드라마 전체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기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 두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 이 부분은 스포일러에 해당하는 부분이니 직접 드라마를 보시며 확인하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네요. 언어학적인 분석을 토대로 증거를 쌓아나가는 과정 자체도 굉장히 인상깊었지만, 그와 별개로 저는 테러범 카진스키의 뒤틀린 인생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수학 신동으로 유명했고 16세에 하버드에 진학했으며 미시간 주립대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은 뒤, 불과 25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캠퍼스 역사상 최연소 조교수로 부임했을 정도로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였던 겁니다. 박사논문으로 미시간 주립대에서 최우수 수학 논문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영민했던 이 젊은 연구자가 어떻게 조교수 부임 2년 만에 갑작스런 사직을 하고 학계를 떠나서 이런 괴물이 되어버린 걸까요?

          저는 무척이나 총명했던 한 청년이 끔찍한 테러범으로 변한 것을 보며, 무라카미 하루키가 1995년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 테러를 일으킨 옴진리교 추종자들에 대해 쓴 <도쿄 지하의 흑마술>이란 에세이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이 테러 주동자들도 심장의과 전문의, 응용 물리학과 박사과정생,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대학원생 등 - 하나같이 사회에서 똑똑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이들이었던 겁니다.

내가 만나 이야기해본 옴진리교 신자의 대부분은 그런대로 ‘건실한’ 중류층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었다. 딱히 불행한 성장과정을 겪은 이들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별 문제 없이 자라났다. 기본적으로 성실히 공부했고, 성적도 좋았다. … 사회를 불신하고 물질주의적 풍조에 비판적이었지만, 그것을 안에서부터 개량하고자 하는 사회적 인식은 갖추지 못했다. 교우 관계는 대체로 좁고, 마음을 터놓는 대화 상대는 거의 없었다. 고독했고 추상적인 생각에 빠지는 일도 많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이영미 역 (비채, 2011), 254-55쪽)

놀랍게도 제가 드라마에서 보았던 카진스키의 성장과정은 하루키가 옴진리교 테러 추종자들에 대해 묘사한 것과 너무나 흡사했습니다. 드라마 내에서 카진스키의 성장과정을 다룬 한 에피소드도 저 부분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고요. 특히 그의 선언문이 현대사회의 물질주의∙소비주의적인 행태를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판의 귀결이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테러로 이어졌다는 점이 더욱 그러합니다. 또한 마음을 터놓는 인간관계를 만들지 못했다는 점은 미국에서 자주 등장하는 총기 테러범들의 성장과정에서 공통적으로 관측되는 부분인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떻게 하면 학창시절 또는 유년시절에 이렇게 인간관계에서 소외되고 마음이 황폐해져가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이 괴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요? 당장 저부터도 학창시절에 외면하곤 했던 "조용한" 또는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들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하루키의 저 글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해드리면서 이 부분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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