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와 "인간에 대한 애정"
새해 첫 달은 잘 보내셨는지요? 이번에는 제가 지난 번 글에서 잠깐 언급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도쿄 지하의 흑마술”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이 에세이를 접하게 된 것은 하루키의 여러 에세이들이 편집되어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비채, 2011)이란 책을 통해서였는데요. 저는 이 에세이를 읽고나서 하루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고, 한국 문단의 일부 평론가들이 폄하하는 것처럼 하루키가 “역사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환상”만을 주입하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방금 인용한 하루키에 대한 비판은 작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 문학포럼에서 한국 문단의 소설가와 평론가들에게서 나온 표현입니다. 저는 저런 식의 “순수문학 엘리트주의”에 젖어있는 태도 자체도 굉장히 거슬릴 뿐 아니라, 과연 저 사람들이 하루키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봤는지조차 의문이 듭니다. 저 역시도 하루키의 소설은 중요한 몇 작품 이후부터 일종의 자기 복제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의 소설을 “진지한 문학”이 아닌, “소비향락주의에 젖은 가벼운 문학”이라고 간단하게 치부할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특히 그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듭니다.
이 <잡문집>에서 “언더그라운드에 관하여”라는 섹션에는 세 에세이 - “도쿄 지하의 흑마술,” “공생을 원하는 사람들, 원치 않는 사람들,” “피와 살이 담긴 말을 찾아서” -가 있습니다. 이 글들은 하루키가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집필하며 중간중간 다른 매체에 기고했거나 작품과 연관지어 썼던 글들입니다. <언더그라운드>는 1995년 3월 20일 일본 도쿄 지하철에서 일어났던 옴진리교 추종자들의 사린가스 테러를 소재로 했는데요, 당시 이 테러는 12명의 사망자와 3천 명이 넘는 부상자를 내며, 1960-70년대 급진 좌파들의 테러 이후,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 외에는 대형사고가 드물었던 일본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사건입니다. 하루키는 이 책을 위해 지하철 사린가스 피해자 중 60여 명을 선정하여 개별적으로 인터뷰를 했는데요, 저도 정작 <언더그라운드>는 읽어보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잡문집>에 실려있는 세 에세이를 읽어보면 하루키가 왜 <언더그라운드>라는 책을 집필하기로 마음먹었는지, 그리고 당시 그런 충격적인 테러를 일으킨 옴진리교 자체에만 초점을 맞췄던 언론과 달리 그가 왜 이 테러의 피해자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세 글은 <언더그라운드>의 프리퀄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가 지난 번 글에서 유나바머(시어도어 카진스키)처럼 이 도쿄 지하철 테러의 실행범 다섯 명이 “단순 무식한 ‘광신도’”가 아니라 “아주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지적 ‘엘리트’” (227쪽) 였다는 점을 이야기했었는데요, 그런데 이런 사실과 아주 극적으로 대비되는 대목이 에세이 "도쿄 지하의 흑마술"에 등장합니다.
아이러니하다면 아이러니한 일이겠지만 -어쩌면 조금도 아이러니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죽인 사람들은 엘리트 기업인도 아니고, 일본의 시스템을 담당하는 고급 관료(그들이 본래 표적이라고 추측되지만)도 아니었다. 지하철역에서 사린 가스를 마시고 호흡 곤란에 빠져 영문도 모른 채 격렬한 고통 속에서 목을 쥐어뜯으며 죽어간 사람들은 시스템 안에서 하루하루를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보내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책을 위해 사건 피해자들을 육십 명 넘게 인터뷰했지만, 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실행범들에 필적할 만한 고학력자는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229쪽)
유나바머가 산업사회의 물질주의적이고 소비주의적인 모습을 비판하며 테러를 일으켰지만 정작 그 희생자들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그 사회 내부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이 옴진리교 추종자들이 “종교적 이상”을 내걸며 일으킨 테러도 비슷하게 평범한 사람들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목숨을 앗아갔지요.
하루키는 자신이 만나서 이야기해본 옴진리교 신자의 대부분이 “그런대로 ‘건실한’ 중류층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었으며, “딱히 불행한 성장과정을 겪은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죠. 이들은 “사회를 불신하고 물질주의적인 풍조에 비판적이었지만, 그것을 안에서부터 개량하고자 하는 사회적 인식"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더구나 "교우관계는 대체로 좁고, 마음을 터놓는 대화 상대는 거의 없었다”고 하루키는 말합니다. 고도성장기의 일본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었지만, 버블이 붕괴되고 전후 일본에서 유토피아적인 환상이 붕괴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게 되었죠. “사회의 경제적 발전이 그대로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테제도 같이 무너졌던 겁니다.
일본이 제아무리 경제적 번영을 숫자로 떠들며 자랑해도 사회를 구성하는 ‘보통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풍요로운 생활을 제 손에 얻었다고는 실감하기 힘들었다. …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 옴진리교에 귀의한 사람들은 - 자기 자신이 안이하게 사회화하는 것에 대해 ‘노’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문제는 사회의 메인시스템에 ‘노’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활력있는 서브시스템이 일본 사회에는 선택지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것이 현대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불행이며 비극일지도 모른다. 서브시스템의 결락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비슷한 범죄가 또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하다. 옴진리교 교단만 무너뜨린다고 그걸로 해결될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236쪽)
제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하루키가 옴진리교에 귀의한 사람들이 대부분 “사춘기 때 소설을 열심히 읽었던”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고, 이를 통해 소설, 더 나아가 "픽션"에 대한 통찰을 끌어내는 대목이었습니다.
아사하라(옴진리교의 교주)가 내세운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픽션이었다. 요컨대 ‘실증의 범위 밖에 있는 것’이었다. 아니, 나는 그것을 비난하자는 게 아니다. 오해를 감수하고 말하자면, 모든 성립 과정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이야기이자 픽션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면에서 이야기는 - 이를테면 백마술로서 - 달리 예를 찾을 수 없는 강력한 치유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우리가 뛰어난 소설을 읽을 때 자주 체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권의 소설이, 한 줄의 말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영혼을 구제한다. (239-240쪽)
이 부분까지는 우리가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상상력을 발휘하고 그 이야기에 몰입하며 “치유받는” 순기능을 말합니다만, 정말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음 문장이었습니다.
다만 두말할 필요없이 픽션은 늘 현실과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 픽션은 우리의 실재를 깊게 삼켜버린다. … 그러나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책장을 덮고,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픽션이 아닌 다른 곳에서 현실세계와 마주선 우리 자신을, 아마도 픽션과 힘을 상호교환하는 형태로, 완성해나가야만 한다.(240쪽)
저는 유나바머와 옴진리교 추종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가 바로 정확히 이 부분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허구의 이야기를 읽고 몰입한 뒤,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와 그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나가는 과정을 "훈련"한 사람들과, “픽션과 사실을 뒤죽박죽 섞어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차이는 명백하게 드러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이 테러를 일으켰던 항공사, 대학, 그리고 지하철 전동차에 앉아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표와 이상을 위해 희생되어도 무관한 존재가 아닌, 바로 자신들의 “이웃”이라는 점을 결코 현실로 자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루키가 <언더그라운드>의 주인공으로 피해자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궁극적인 이유도 이 대목과 연관되어 드러납니다. 언론이 옴진리교의 교주와 그 추종자에 대한 취재에만 열을 올리는 사이에, 이 피해를 입은 보통 시민은 철저하게 배경 - “얼굴도 없고, 고유한 목소리도 갖고 있지 않는” - 으로만 존재했다는 거죠. (242쪽)
따라서 나는 그들 피해자에게도 생생한 얼굴과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그들이 대체될 수 없는 개별자이자 동시에 각자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임을(요컨대 그들은 어쩌면 나고 당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드러내고 싶었다. 그것이 소설가가 해야 할 하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소설가는 아둔하고 요령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세상사를 안이하게 일반화하지는 않는다. (242-243쪽)
한국 문단의 일부 평론가와 소설가들이 성토하는 것처럼 과연 하루키가 역사와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가벼운 문학을 만들어내는 작가라고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작년의 국제 문학포럼에서 하루키에게 가해졌던 (심지어 “골빈 대학생이 좋아하는” 이라는 저열한 표현까지 등장했지요) 비방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하루키는 그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존재와 그들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역사와 현실을 그렇게 떠받드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소위 “민중”이라는 손쉬운 범주로 이들의 삶을 안이하게 일반화하진 않는 거죠.
제가 역사를 공부해서 그런지 하루키의 이러한 시선이 더 마음에 들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 기록에서 배제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설령 글을 읽고 쓰지는 못했더라도 (그래서 그 역사기록에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분명한 자기 생각을 갖고 있었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20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이후의 역사연구에서 드러났듯이 말이죠. 세 번째 에세이 “피와 살이 담긴 말을 찾아서”의 마지막 단락에서 하루키는 <언더그라운드> 집필 이후 자신의 일상 속 변화를 언급하는데요, 저에게 아주 의미가 깊은 구절입니다. 6년 전, 저 마지막 단락을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저 역시도 전철이나 버스를 탈 때 이 대목에 나오는 하루키의 행동을 곧잘 따라하게 되었습니다. 대체될 수 없는, 그리고 각자 고유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 개별적 인간 하나하나, 그리고 그 “보통 사람이 들려주는 보통 이야기”에 대한 애정이 바로 인문학의 존재기반이자 이 혐오의 시대를 이겨내는 동력일 겁니다.
그래도 단 한 가지 눈에 보이게 변화된 점이 있다. 전철에 타면 아주 자연스럽게 주위 승객들을 둘러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이 사람들 모두가 각자 심오한 인생을 사는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래,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고독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고독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이 작업을 하기 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것은 단지 전철이요, 단지 ‘낯선 타인’일 뿐이었다. 그것은 지금 나에게 하나의 큰 수확이다. (257-2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