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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깎이 Jun 05. 2020

아이의 삶에 대한 기대, 그리고 교육

자식 교육으로 사람들과 대화하는 날이 이렇게나 빨리 올 줄 몰랐다. 주변에 점차 아이를 낳고 키우는 친구들, 선후배들이 많아지니 자식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정신없는 단체 카톡방에서 한 번 교육에 대한 이슈가 떠오르면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보탠다. 고작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일 뿐인데 벌써들 걱정이 한 짐이다. 여기에 교육 전공한 이가 끼어들면 대화는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차분한 토론이나 의견 교환이 된 적은 없다. 온라인에서의 대화 형식이 주는 정신없음과 혼란함도 원인이지만, 무엇보다 모두들 자식 교육에서도 특히 집중하는 분야가 다르다. 그래서 결국 각자 자기 얘기하고, 각자 자기 자식 이야기를 하는 꼴이 되고 만다. 


많은 경우 영어 교육이 문제다. 영어 유치원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좋다는 영어 책들, 프로그램들을 서로 추천하기도 한다. 영어 교육 방법에 대한 링크를 소개하기도 하고,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해외에서 한 달 살기 프로그램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기도 한다. 그러다 누군가 문득 물었다. 왜 이렇게 영어에 목매다는 거야? 


난 지금 영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저 질문에는 수없이 많은 대답이 가능하다. 수능 영어부터 비즈니스 회화까지 이제는 삶에 필수라는 이야기부터, 광범위한 지식 습득을 위한 도구로서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등등. 그러나 갑작스럽게 저 질문을 맞닥뜨렸을 때, 불현듯 부모의 필요가 아이의 필요로 너무나 당연히 이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업무상 영어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에도 성인이 되어서는 도무지 영어 실력을  키울 수 없는 나 포함 많은 내 또래 부모들은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영어는 잡아줘야 앞으로의 인생이 편해질 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 어릴 때 영어 잘 다져놓아서 나쁠 거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 필요가 나의 필요인가 아이의 필요인가? 영어는 나의 약점인가 아이의 약점인가? 아이는 정말로 지금 아니면 영어를 잘하게 될 기회를 영영 잃게 되는 것인가?


나는 내 아이의 영어 공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영어를 매우 잘하기 때문도 아니고, 영어가 전혀 필요 없는 직종에 종사하기 때문도 아니다. 단순히 나는 내 아이에게 영어보다 더 크게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내 머릿속에 있었던 단어는 '창의력'이다.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고, 그걸 외워 잘하는 것보다 더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창의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많은 지식 습득용 전집이나 영어는 내 관심 밖이었고,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좀 더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키울까를 항상 생각해왔다. 그러다 보면 하나 둘 집착하는 것들이 생긴다. 이건 다른 말로 하면 무언가를 배제하게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 한 번 해외의 어느 나라에서는 4세 이전에 문자를 가르치지 않는데, 왜냐하면 문자의 이른 습득이 창의력 성장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면 나는 이제 글자를 억지로 가르치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글자 자체를 성장 방해 요소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시야가 좁아지고 억지스러워진다. 


나는 성인이 된 후 어느 순간부터 내 창의력 수준이 원망스러웠다. 도무지 창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삶, 글이든 그림이든 보고서든 뭐 하나 만들어도 독창적이지 못하게 되는 나의 결과물들이 싫었다. 내가 조금만 더 창의력을 높일 수 있도록 교육받았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좋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다. 영어든 창의력이든,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이든 아마 우리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 혹은 성장 과정에서 부족했다고 생각한 것에 집중하여 아이의 교육 계획을 짜는 것이 아닐까? 나의 창의력에 대한 엉뚱한 집착은 모순되게도, 아이의 미래에 내 기대와 바람을 투영하지 않겠다는 나의 대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된다.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걸 주고 싶다. 부족하지 않게 키우고 싶다. 나 역시 교육열 대단한 부모 아래에서 자랐고, 때로는 수많은 기대들이 버겁고 힘들었다. 그러나 결국 내 삶은 내 부모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내 자식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질 수 있도록 애쓰며 기대한다. 내가 낳은 아이가 올바른 사람으로, 좋은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서 사회에서 안정되게 살아가길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의 소원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교육이라는 중요한 화두가 내 삶의 콤플렉스나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계는 지금 우리가 보는 세계와는 다를 것이다. 영어든 수학이든, 창의력이든 논리력이든 앞으로 내 아이가 잘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혹은 어떤 능력을 바탕으로 삶을 가꾸어 나갈지는 내가 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어떤 삶도 좋다 나쁘다 내 기준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기대를 내려놓는다. 한 번이 아니라 자꾸만 내려놓아야 할 것 같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부모가 주지 않은, 혹은 주지 못한 것이며 그래서 부모로서 내 자식에게는 그것을 되물려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건 잘못된 결론이었다. 내 부모는 얼마나 많은 것을 내게 주었는지. 자식으로서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보다 가진 것, 가져온 것에 집중하면 좀 더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부모로서 나는, 내가 못 가졌기에 내 자식은 가져야만 하는 능력과 스펙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내 아이가 이미 가지고 태어난 것, 그리고 갖고 싶어 하는 것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초보 부모인 나는 자식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덜어내는 일이 제일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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