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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런치 봉작가 Sep 21. 2024

사무직 아들과 현장직 아버지, 체리농사를 함께하다.  

아버지는 평생을 공장현장직에서 기계를 수리하며 기름밥으로 평생을 가족을 부양해 왔다. 아버지는 아들의 첫 직장이 쥐꼬리 만한 월급쟁이직 이지만, 

하얀 와이셔츠 입고,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자체만으로 다행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중소기업 공장에서 주야간 교대로 일을 하며, 기계가 고장이 나면, 보수하고 점검하는 일을 30년을 했다. 아버지는 신화에 나오는 헤파이토스 같은 사람이다. 쇠 일을 했고, 뭔가 고장 나면 뚝딱 고쳐내고, 거친 삶의 사람이다. 그런 아버지가 절대 원하지 않았던 건, 자신의 길을 그 아들이 똑같이 가는 것이다.  


그 이유는 현장에서 일을 한다는 건, 위험이 항상 뒤따른다 걸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손가락의 신체 일부는 사고로 절단되었다. 어려서 아버지의 손가락을 보는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아버지가 살아온 기계공장 현장은 항상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이 있고, 한 순간의 실수로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


아버지 손은 굳은살과 거칠함, 잘린 손가락은 그것을 증명한다.


아버지의 바람은, 아들이 사무실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 쐬며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직업이면 된다.


아버지의 바램 때문인지, 대학교 4년을 전자공학을 공학을 전공했던 그 아들은,  생각하지 못한 복지관에 첫 취직을 했다. 이후 직장과 대학원을 병행하며 아동관련 치료학 석사를 공부했고, 박사까지 공부하고, 정말 사무직 종사자가 되었다.  


그런 이런 바램의 일부가 조금씩 이상하게 흘러갔다. 아버지는 은퇴하였고, 그 아들의 권유로 생애 처음 농사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도 농사최고 난이도라는 체리농사를 처음으로 시작하게 된것이다.


체리농사를 인터넷과 유튜브로 공부하여, 다양한 시행착오를 하며 진행해 왔다. 그러다 체리농사 4년 차쯤, 아버지와 아들은 크게 다툰 적이 있다.


본인 때문에 농사일을 하던 사람도 자식만은 안 시킨다는데, 자신 때문에 농사일을 아들이 시작한 것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름일이나 농사일이나 몸에 뭔가를 묻혀야 하고,

일단 몸이 일단 피곤한 일이다. 또한 농사일도 위험이 존재한다. 여름날의 땡볕에 핑도는 어지러움을 경험하게 되고, 제초작업에 말벌에 쏘이기도 한다.

한번은 말벌에 쏘여, 밤에 두통에 힘겨워 했다. 그리고 칼날이 돌아가는 농기계도 조심해야 한다.

농사는 리틀포레스트 낭만만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의 고단함이 존재한다.


아버지는 부동산에 조성된 농장을 내다가 보는 것이 어떻냐고 물었다. 불현듯 아들은 화를 냈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아버지 입장에 버럭 싸가지 없이 말했다.  


아버지에게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나이가 들면 걱정이 많다. 하얀 와이셔츠에  시원한 곳에 일하는 직업이라 좋아했고, 박사까지 공부한 아들이 농사일이라니... 뭔가 잘 못된 것 같다. 나중에 자신이 없는 상태에, 혼자서 이 힘든 농장일을 계속 이끌어갈 아들이 걱정이다. 결국에는 지금에 정리하지 않으면... 농사일을 시작한 것 자체가 뭔가 잘못된 선택이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농사일 경험이 없었기에, 겁없이 시작 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아들의 생각은 달랐다. 돈만 생각했다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몸을 움직여 일하고, 어딘가에 갈 곳이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걸 일찍이 아는 건,  이십대 노인일자리 사업을 담당자 했고, 노인에게 일자리가 얼마나 중요하는걸 아들은 안다.


그래서 그 사무직 아들은 아버지가 은퇴하고 2년이 지난 시점, 체리농사를 생각했다. 체리농사 지을 땅을 알아보기 위해 땅을 보러 다녔고, 부동산에 비싼 시골땅값에 경악을 했다. 교차로 부동산 정보에서 나중에는 경매물건들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여러번의 용기 낸 경매 도전 끝에 시골땅 2,000평을 단독 낙찰 받았다.


당시에 땅값을 지불할 목돈이 없었기에, 낙찰 받은 그 시골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받았고, 아들인 나는 원금과 이자는, 아직은 젊기에 매달 차근차근 조금씩 갚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무직 아들과 현장직 아버지가 10년째 체리농사를 이어오고 있다. 다시 한번 확인한 건

서로를 생각하는 본심은 똑같지만, 부자는 태도와 방식에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말도 조리 있게 못 하는 사람이라면, 아들은 그와 정반대로 상담이란 말로 밥 벌어 먹는 직업이다.  또한 아버지는 뭔가를 고치는 것에 손재주가 있다면, 아들은 어려서 뭔가를 분해하고, 만지면 다시금 조립이 안 되고 망가졌다. 그러나 모든일에 기획은 잘한다.  


그렇게 다른 아버지와 아들이 올해 십년째 체리농사를 해 왔다. 아들은 체리농사일과 사무직일을 병행하는 N잡러가 되었다. 그러나 아들은 안다. 아버지와 함께 체리농사의 함께 짓는 이 시간이 계속 줄고 있다는 것을...  얼마전 여행에서 잘 못 걷고, 힘들어 하는 아버지를 보고, 세월이 계속 흘러가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사무직 아들이, 농사의 피곤함에 체리농사를 포기하지 않는건, 돈보다도 소중한 지금의 시간 때문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무직 아들과 은퇴한 현장직 아버지와 함께 일한 시간들.


이 시간의 기록을 차곡차곡 쌓아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사무직 아들은 아직은 아버지와의 체리농사의 역사와 기록을 멈출수 없다.


By 브런치 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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