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작품의 유기성을 산책하다
전시관에 들어서자 '삐그덕 삐그덕' 마루의 소리가 관람자를 반긴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정겨운 소리이다. 그 정겨움 덕에 공간은 순식간에 보는 이의 마음 가까이 다가와 문을 두드린다. 시선은 소리가 시작된 바닥에서 이동하여 벽과 벽에 걸린 그림들 그리고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구간과 깊고 긴 창으로 차례로 이동한다. 이 공간의 설계자는 프랑스 출신 건축가 로랑 보두엥이다. 보두엥의 <이응노 미술관>은 선생의 '문자추상' 시기의 작품을 재해석하여 상징화하였다. 보두엥을 정의하는 훌륭하고 좋은 수식어들이 많지만 굳이 쓰지 않은 이유는 이 건축과 이응노의 작품이 만들어내는 조화를 직접 보고 각자만의 수식어를 떠올리기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전시관에 들어서며 낯설지 않은 나무의 소리를 벗 삼아 첫 번째 작품과 마주한다. 고향땅의 흙 질감이 살아있는, 원경과 근경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어찌 보면 고향땅의 흙바닥을 매우 가까이서 바라본 모양이고 또 어찌 보면 비행 중 적당한 고도에서 내려다본 굽이치는 산과 강과 땅의 모습이다. 콜라주로 표현된 선생의 작품은 다소 거친 질감과 색의 조화로 신비한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작품이 완성되던 시기 선생은 독일을 거쳐 파리의 땅을 밟고 있었는데, 궁핍한 생활로 아침마다 작품의 재료가 되는 버려진 신문과 잡지를 줍는 것이 일과 중 하나였다. 이 작품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생경한 재료를 통해 떠나온 고향땅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다음 작품부터는 추상 속 구상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로는 감상이 이어진다. 직관적으로 보았던 형상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고 재빨리 단순한 스케치를 한다. <이응노, 구성, 1962, 77X64cm> 이 작품에서 날개를 달고 날아가려는 한 사람을 보았다. 알을 깨고 꿈꾸던 이상을 향해 날갯짓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데미안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과연 고암이 날아가려던 신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며 다음 작품으로 걸어간다. 여전히 삐그덕 거리는 마루의 소리는 기분 좋은 울림이 되어 관람자를 따른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____________.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어, 여기도 사람이 있네'
어디론가 달려가지만 남겨두고 간 것을 뒤돌아보는 한 사람이 있다. 그의 몸은 전속력으로 앞으로 돌진하고 있지만 시선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있다. 그가 남겨두고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에서도 고향이 떠오른다. 고향에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타국으로 이주하여 가난한 예술가로 살았던 시절, 잡지와 신문을 주워다 나르며 악착같이 앞으로 앞으로 나갔던 고암이었지만, 두고 온 고향의 온도와 향기가 늘 그립지 않았을까. 그러나 작품 속 인물은 고향의 향수를 가득 안고 여전히 앞으로 앞으로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번에는 만개한 꽃이 가득한 화병이 있는 정물과 마주한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무채색에 가깝지만 살짝살짝 드러난 옅은 색상들이 오히려 더 고운 빛깔로 비쳐 보인다. 조금 무겁고 건조할 수 있는 무채색 속에서도 탐스러운 꽃의 생동감과 생명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바닥에 떨어진 한송이 꽃 조차도 '나도 아직 살아 있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것 같다.
<이응노, 구성, 1961, 116X89cm, 캔버스에 콜라주>에선 늠름한 사슴 한 마리가 고개를 치켜들고 서있다. 사슴은 가슴을 활짝 펴고 '나는 누가 뭐래도 나만의 길을 간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이토록 당당한 사슴은 따사로운 빛에 감싸여 있다. 그 빛은 적당히 밝으며 영롱하고 뽐내는 기색이 없으며 편안하게 작품 속에 스며들어있다.
<이응노, 인간 추상, 1963, 91.5X73cm, 캔버스에 콜라주>는 이번 전시 첫 공간의 마지막에 걸려있다. 선생의 그림 속 그 누구도 가만히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 저마다의 표현과 몸짓을 가지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함께 그 움직임을 완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움직임들은 번잡하고 복잡하게 보이지 않고 고요하면서도 우아해 보인다. 선생은 인간을 그러한 관점으로 바라보았던 것일까? 잠시 생각에 잠기며 다음 공간으로 이동한다.
'종이의 느낌'이라는 타이틀은 단 다음 공간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바닥으로부터 솟은 가로로 긴 창과 바닥과 천정을 연결하는 세로로 긴 창이 어우러져 따뜻한 채광을 선사하고 천정과 한쪽 벽에 둘러진 촘촘한 나무의 행렬은 창밖으로 비치는 봄의 푸르름을 공간 내부로 빨아드리고 있었다. 마치 맑고 청량한 숲 속 언뜻언뜻 비치는 햇살 속에서 작품과 산책하는 느낌과 함께 이곳이 닫힌 세계가 아닌 열린 세계라는 이미지를 준다.
<이응노, 구성, 1977, 신문지에 수묵>은 총 10점의 작품으로 공간의 한쪽 벽에 나란히 걸려있다. 이 그림들 중 한 작품에서 공간이 주는 밝고 신선함과는 반대되는 감상이 다가온다.
작품(사진 왼쪽)을 보자 가슴이 아린 것이 느껴진다. 생의 끝자락에 놓인 부모와 그런 부모를 하릴없이 지켜보며 목놓아 우는 자식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눈물이 넘쳐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늘을 바라보지만 마음은 더 먹먹해지고 눈물의 물결은 거세진다. 이렇게 작품과 마주하며 아픔과 슬픔이 느껴질 때면 늘 당시 작가의 삶은 어땠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1977년 고암 선생은 '파리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유럽인들에게 한국화와 서예를 가르치고 있었다. 한 해 전인 1976년에는 학생들의 작품 발표를 위해 파리 최초의 한인 화랑인 '고려화랑'을 개관하기도 했다. 고암 선생은 1960년 후반부터 몰두하던 '문자추상'과 1964년 설립한 '파리 동양미술학교'를 통해 자신의 작품세계를 넓히는 동시에 후학의 양성을 실행하고 있었다. 작품에서 느껴지던 '하릴없음'과는 전혀 반대되는 행로를 1970년대 고암은 꿋꿋하게 걷고 있었다.
이렇게 언제 어느 때나 신념 있고 당당한 고암에게도 혹독했던 시간이 있었다. 세계적인 작가로의 명성을 쌓아가던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약 2년 반 동안의 옥고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선생은 이 시기에도 간장과 된장을 재료 삼아 화장지에 데생을 하고 밥풀과 종이로 조소 작품을 만드는 등 약 300여 점에 이르는 주옥같은 옥중화를 남겼다.
오전의 햇살을 머금은 넓고 시원한 창을 따라 이어진 복도는 3과 4전시관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고암 선생의 1970년대를 중심으로 '문자추상'을 종이 릴리프(relief:돋을새김, 부조)의 방식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이 무렵부터는 작품에 배어있던 아쉬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마치 태고적으로 돌아간듯한 순수함과 활력이 느껴진다.
전시된 작품 중 '군상'이라 이름 붙여진 작품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인간은 언뜻 각기 분리된 개체 같지만 실상은 모두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군상을 구성하는 각각은 어느 한 구석은 누군가에게 맞물려있고 그 맞물림은 또 잇달아 끊어지지 않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이어진다. 작품 속 모두는 서로 한데 엮여 분리될 수 없는 존재들이며 현실의 우리도 역시 그러하다. 1980년대 고암 선생의 인생관과 예술관이 집약되어있는 '예술의 대미'라 할 수 있는 군상을 감상하며 그 의미를 미약하게나마 짐작해 본다.
이번 전시에서는 마지막 공간에서 처음 공간으로 돌아가 다시 마지막으로 빠르게 훑어 돌아오는, 일종의 전시를 마무리를 짓는 의식과도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대신 전시관 출구로 향하는 마지막 길을 걸으며 지나온 공간을 뒤돌아 본다. <이응노, 종이로 그린 그림> 속 작품과 공간, 그 모든 것들은 분리된 듯 너무나 유기적이었다. 지나쳐온 작품들은 '두고 왔다'는 생각보다 '거쳐왔다'는 느낌을 받게 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눈과 마음에 담았던 작품과 공간들이 함께한다. 고립된 느낌 없이 자유롭지만 안정된 관람을 마무리하며 고암의 부인 박인경 여사의 말을 마지막으로 천천히 음미하며 작품과의 산책을 마무리한다.
*<이응노, 종이로 그린 그림> 가상현실(VR) 전시를 운영중 입니다*
http://planm.ipdisk.co.kr/publist/HDD1/vr/leeungnomuseum/index.html
<참고 및 인용>
https://www.leeungnomuseum.or.kr
이응노, 종이로 그린 그림 - 전시 팸플릿
이응노 미술관 2020 안내 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