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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Jan 14. 2022

281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In Jeju

오늘은 4박 5일 함께했던 동료들이 떠나는 날이다. 약간 늦은 아침으로 홍콩식 밀크티와 에그타르트를 파는 파란 카페로 향했다. 그곳에 앉아 제주에서 있었던 이야기 그리고 부산으로 돌아가면 함께 할 일들을 순서 없이 한바탕 신나게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뜨끈한 고기국수로 일정을 마무리하고 로터리에서 그들을 떠나보냈다. 안녕히!




옛말에 틀린 것이 없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지 않나. 친애하는 나의 동료들이 떠나자 조금은 쓸쓸해졌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나의 마음과 생각은 쓸쓸의 길을 따라 여행을 떠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여전히 쓸쓸의 길 쪽으로 머리를 향하는 마음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길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남원 큰엉 해안 경승지로 정했다. 내가 그곳에 가는 이유 중 가장 큰 한 가지는 2021년 신년에 그렸던 나의 그림과 관련이 있다. 양쪽으로 드리워진 나무들 사이로 노을 지는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는 짧은 머리의 나와 내 고양이의 뒷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가끔 무언가를 보았을 때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장면들이 있는데, 이 그림도 그렇게 그려졌다. 실제로 가본 적이 없이 사진을 보고 그렸기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직접 두 눈으로 그곳을 담아오자고 마음을 먹었다.



우리 2 | 김정아 | 2021 | Digital Painting


281번 버스에 올랐다. 10년 넘게 신분증으로만 사용되는 나의 면허 덕분에 이번엔 남제주를 기점으로 제대로 된 버스여행을 하는 중이다. 제주 버스는 장거리를 가는 간선버스가 많기 때문에 앞에 3-4줄은 거의 나이가 많은 분들을 위해 비워두어야 한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제주 간선 버스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차량에 부착되어 있는 선팅필름인데, 처음엔 이것 때문에 대략 난감했다. 물론 눈부심이 줄어들긴 하지만, 대신 제주의 날것 그대로의 색을 감상할 수 없어 무척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누군가 제주 버스 여행을 한다고 하면, 특히 해안을 달리거나 중산간을 가로지르는 간선의 경우는 꼭 기사 아저씨와 먼 맨 앞자리에 타기를 추천하고 싶다.


이제는 낯익은 비석거리에서 내려, 잠시 들러보려던 필름 가게에 바람을 맞고 다시 버스를 탔다. 이미 김영갑 갤러리에서 시원하게 한 번 바람을 맞은 터라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냥 나와 인연이 없는 장소구나 하며 기울어가는 해의 방향과 멀어지며 달렸다. 버스는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늘에서는 하얗고 조그마한 눈이 날리고 있었다. 이제는 명승지라는 명칭에 걸맞게 구경하고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줄을 선다는 그 지점을 향해 박차를 가해 뛰어가듯 걸어가고 있을 때, 때마침 고양이를 만났다. 목적지가 순식간에 바뀌는 순간이었다. 녀석은 인간이랑 꽤 친한지 덥석덥석 내가 꺼낸 것들을 받아먹고 제법 그럴듯한 사진을 찍도록 허락해줬다. 덕분에 나의 쓸쓸함 중 절반이 날아가버렸다. 녀석과 헤어지고 내리막을 내려가서 방향을 조금 더 서쪽으로 틀었을 때 그곳이 나타났다. 드디어 이렇게 만나는구나. 그림 속 나와 내 고양이가 있었던 자리.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그 자리에 섰다. 엄청난 감회 대신 기다리는 사람들을 배려해 빠르고 정확하게 셔터를 누르고 순간을 기록했다.



인파에서 벗어나 잠시 지도를 살피니 이곳은 올레길 5코스와 연결된 지점이었다. 아직 해가 1시간 정도는 버텨줄 것 같아 이어진 길을 따라 계속 걷기 시작했다. 해는 시야의 정면에서 나와 마주 보며 멀어지고 있었다. 10분 정도 걸었을 때 굳건히 지키고 싶었더 이번 여행의 신념을 깨버릴 수밖에 없는 광경과 마주했다. 서쪽으로 기우는 햇살이 마지막 힘을 다해 땅과 대기를 감싸 안고, 그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작고 가벼운 눈송이의 금빛 세상을 만난 것이다. 이번 여행은 기록보다는 기억하는 여행이 되리라고 마음먹었건만, 나는 줄곧 내 여행의 동반자였던 작은 기계를 꺼내 가장 반짝이던 순간의 그 길을 기록하고야 말았다. 역시 여행이든 인생이든 계획했던 멋진 일보다는 우연히 만난 멋진 순간이 더 벅차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구나를 다시 한번 실감하며 남은 길을 재촉했다.


해가 기울어질수록 바람은 거세지고 나의 발걸음도 덩달아 세차게 달린다. 남은 쓸쓸함은 그대로 마음에 두고 다시 281번 버스에 올랐다.




오늘의 걸음 +15387

달라진 점

스스로에게 후회대신 괜찮다고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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