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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선 Nov 21. 2024

오늘은 빨강

     

빨강이 땡기는 날이 있다. 아무리 집밥 애호가라도 가끔 나가서 먹고 싶을 때가 있는 것처럼 빨강은 그림의 ‘외식’, 그중에서도 디저트와 같다. 우리는 보통 디저트를 먹으러 카페에 가지는 않는다. 디저트는 커피와 함께일 때 그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가끔 커피 맛이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디저트가 맛있으면 용서가 된다. 하지만 종종 반대의 경우도 있으니 디저트를 먹기 위해 카페에 가는 경우도 있다. 내 친구는 오직 유명한 에그 타르트를 맛보기 위해 (물론 커피도 마셨겠지만) 마카오 여행을 다녀왔다. 그림에서 빨강도 그렇다. 스산한 풍경이나 중심이 될만한 소재가 없을 때 주변에 빨강이 있다면 그 그림은 일단 절반의 성공이다. 하지만 풍경에서 (특히 우리나라) 빨강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빨강이 보이면 일단 자리를 잡는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문제는 적당한 비율, 그 강렬함에 고취되어 빨강을 남발(?)하면 부작용을 초래한다. 열정, 경축, 따뜻함의 미덕을 지닌 빨강은 흥분, 분노, 위험, 경고의 악덕도 겸비하고 있다. 디저트 과잉섭취와 다를 바 없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그냥 끌리는 대로 하면 된다. 갑자기 땡기는 음식이 그 순간 내 몸이 필요로 하는 생존 음식 같은 것이라면 어느 날 땡기는 색은 내 마음의 컬러 테라피다. 

    

빨강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기억을 따라 내려가보면 ‘빨강머리 앤’ 정도. 사실 빨강은 주인공의 이름, 또는 외모의 한 부분일 뿐 내용과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빨강이 들어간 제목은 독자의 호기심을 이끌어 내는데 한몫을 한다.

돌이켜보니 어린 시절 엄마가 짜준 빨간 스웨터, 빨간 내복처럼 내가 가진 12색 크레용 안에서 빨강은 없어서는 안 될, 가히 색의 반장이었다. 격세지감, 문명과 함께 세분화를 거듭한 색의 홍수 속에서 빨강은 점점 잊혀 갔다. 하지만 돌고 도는 세상. 빨강은 이제 빈티지로 돌아왔다.

 -‘노장(빨강)은 죽지 않는다. 빈티지가 되어 돌아올 뿐이다’.-

     


빨강은 ‘환기’의 역할을 한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창문을 열 듯, 마음이 답답할 때 빨강으로 마음을 연다. 그림의 빨강도 마찬가지, 맑은 날보다 흐린 날 더 존재감이 커진다. 회색빛 도시는 조도 높은 가로등이 필요하니까.  희뿌연한 미세먼지로 뒤덮인 창밖 세상, 오늘의 컬러 테라피는 빨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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