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이 땡기는 날이 있다. 아무리 집밥 애호가라도 가끔 나가서 먹고 싶을 때가 있는 것처럼 빨강은 그림의 ‘외식’, 그중에서도 디저트와 같다. 우리는 보통 디저트를 먹으러 카페에 가지는 않는다. 디저트는 커피와 함께일 때 그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가끔 커피 맛이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디저트가 맛있으면 용서가 된다. 하지만 종종 반대의 경우도 있으니 디저트를 먹기 위해 카페에 가는 경우도 있다. 내 친구는 오직 유명한 에그 타르트를 맛보기 위해 (물론 커피도 마셨겠지만) 마카오 여행을 다녀왔다. 그림에서 빨강도 그렇다. 스산한 풍경이나 중심이 될만한 소재가 없을 때 주변에 빨강이 있다면 그 그림은 일단 절반의 성공이다. 하지만 풍경에서 (특히 우리나라) 빨강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빨강이 보이면 일단 자리를 잡는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문제는 적당한 비율, 그 강렬함에 고취되어 빨강을 남발(?)하면 부작용을 초래한다. 열정, 경축, 따뜻함의 미덕을 지닌 빨강은 흥분, 분노, 위험, 경고의 악덕도 겸비하고 있다. 디저트 과잉섭취와 다를 바 없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그냥 끌리는 대로 하면 된다. 갑자기 땡기는 음식이 그 순간 내 몸이 필요로 하는 생존 음식 같은 것이라면 어느 날땡기는 색은 내 마음의 컬러 테라피다.
빨강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기억을 따라 내려가보면 ‘빨강머리 앤’ 정도. 사실 빨강은 주인공의 이름, 또는 외모의 한 부분일 뿐 내용과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빨강이 들어간 제목은 독자의 호기심을 이끌어 내는데 한몫을 한다.
돌이켜보니 어린 시절 엄마가 짜준 빨간 스웨터, 빨간 내복처럼 내가 가진 12색 크레용 안에서 빨강은 없어서는 안 될, 가히 색의 반장이었다. 격세지감, 문명과 함께 세분화를 거듭한 색의 홍수 속에서 빨강은 점점 잊혀 갔다. 하지만 돌고 도는 세상. 빨강은 이제 빈티지로 돌아왔다.
-‘노장(빨강)은 죽지 않는다. 빈티지가 되어 돌아올 뿐이다’.-
빨강은 ‘환기’의 역할을 한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창문을 열 듯, 마음이 답답할 때 빨강으로 마음을 연다. 그림의 빨강도 마찬가지, 맑은 날보다 흐린 날 더 존재감이 커진다. 회색빛 도시는 조도 높은 가로등이 필요하니까. 희뿌연한 미세먼지로 뒤덮인 창밖 세상, 오늘의 컬러 테라피는 빨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