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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선 Aug 09. 2023

추억이 되어버린 ‘여름’이라는 낭만.

-여름이 실종되었다-


올여름 내내 상실감에 시달렸다.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데 뭘 잃어버렸는지 모르는 답답함으로 증상은 시작되었다. 뭘까? 뭐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상실의 느낌이 거대한 기류가 되어 떠다니던 중, 어슴프레 그 실체가 드러났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여름, 정확히 말하면 여름이라는 감각이었다. 지금이 여름인데 웬 궤변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 계절은  내가 익히 알던 여름이 아니다. 뿔난 여름? 미친 여름? 이 새로운 계절을 뭐라 명명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더우니까 여름이다. 여기에 태클을 걸 사람은 없다. 문제는 정도를 넘어선다는 것. 지구온난화의 시대는 끝나고 끓는 기후의 시대가 되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역대급, 폭염, 슈퍼 울트라. 수식어가 붙지 않는 그런 여름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었을까.

겨울이 따스함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는 계절이라면 여름은 시원함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 계절이다. 하지만 이제 온도계의 숫자만 다를 뿐 여름은 겨울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가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저마다의 수식어가 있다. ‘여름은 젊음의 계절, 여름은 사랑의 계절’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노래속에서 여름과 낭만은 동의어다. 푸른 바다, 시원한 계곡, 사랑, 젊음, 우정. 여름을 기다리게 하는 여름방학과 여름휴가, 여름철 사람들의 인사는 ‘휴가 어디로 가세요?’ 산파, 바다파, 계곡파, 취향에 맞춰 삼삼오오 계획을 짜는 재미로 사람들은 더위를 잠시나마 잊곤 했다. 그래서 여름의 수식어는 낭만, 여름은 낭만의 계절, 그땐 그랬다.

지금은 어떨까. 바다와 산을 찾기보다 에어컨이 있는 곳을 찾지 않을까. 휴가지는 호텔, 만남의 장소는 대형쇼핑몰, 여름 노래를 들으며 추억에 젖는 것도 가성비 갑 피서의 한 방법이다.

어느새 극기의 계절이 되어버린 여름, 보내고 싶지 않고 떠나고 싶지 않아도, 떠날 수밖에 없는 ‘그때의 여름’은 정녕 전설이 되어 사라졌을까. (‘가을의 전설’은 멋진데 '여름의 전설'은 괴기영화의 제목 같다.)

      


냉방장치가 되어있는 실내에서 보이는 바깥은 평화롭기만 하다. 음이 소거된 창밖 세상은 마치 시에스타중 인듯 고요하다. 푸른 하늘과 두둥실 떠다니는 구름 아래 말갛게 햇빛 샤워중인 세상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창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연과 문명은 대치 중이다. 하지만 자연은 맞서 싸울 대상이 아니다.

싸울 대상은 견디고 극복해야 할 자신이다.

당연히 있으리라 여겼는데 어느 날 아무리 찾아도 없는 물건처럼 여름은 사라졌다. 가해자이며 공범인 우리는실종신고조차 할 수 없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힘들 때마다 외우던 주문은 여기서 책임회피가 된다.

어질러진 방은 어지른 사람이 치워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자유로울 자가 어디 있으랴.

     

기승전결, 여름은 절정을 지나고 있다. 상실감, 당혹감, 불안, 반성. 여러 가지 감정의 채널이 뒤엉켰던 이번 여름의 서사도 저물고 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넘어가기에는 힘들었던 몸과 마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 글쓰기로 마음을 추슬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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