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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선 Apr 15. 2024

지극히 사적인 '누드 크로키'라는 세계

       

지난겨울 누드 크로키를 시작했다. (이하 누크). 수채화를 할 때 했으니 처음은 아니나 십오 년 전이니 시작이나 마찬가지다. 동기는 겨울이라는 계절이다. 어반 스케치는 현장성이 첫 번째 강령이다 보니 겨울은 비수기에 해당한다. 창밖 뷰 좋은 카페를 찾아다니기도 하지만 봄, 가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나가게 된다.

이래저래 심심하던 차, 어반 스케쳐들이 만든 누크반에 일단 원데이를 신청했다.

처음 생각은 그랬다. 긴 겨울 보내기용, 손 풀기용, 선과 각, 면 연습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그림도 그리고, 내게 누크의 사용설명서는 ‘어반 스케치 동계 훈련용’이었다. 모델을 보고 그리니 현장성이라는 관점에서 누크도 어반 스케치라고 합리화(?) 시키고. 또 다른 중요한 동기는 재료의 소진이다. 백지를 버리지 못하는 성격상, 오랜 시간 쌓여있는 종이와 작업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가지각색의 채색 도구들 (물감, 색연필, 잉크, 펜, 마카, 파스텔, 콘테, 색 펜 등)은 일주일에 한두 장 그리는 불성실한 어반러인 내게는 부담스럽기만 했는데 (앞으로도 새로운 도구들로 계속 쌓일것이고) 이럴 때 하루 40장 정도를 그리고 버릴수 있다는 사실에 유레카를 외쳤다. 누크는 종이와 펜에 청탁을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료에 따라 그림도 달라지니(수채가 되기도, 한국화가 되기도) ‘도랑치고 가재 잡기’가 이런 것이라고 자족했지만.. 결론은 ‘그건 네 생각이고’였다.

         


그런 생각으로 시작한 누크가 겨울이 지나고 어반 성수기인 봄이 왔지만 계속되고 있다.

주변만 어슬렁거리다 돌아오려 했는데 어느새 안으로 들어가 즐기고 있는 예상치 못한 내 모습은 누크를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누크는 내 생각과 달리 그 무엇의 대용물을 아닌,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였다. 어반 스케치를 회화의 밑그림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누크를 어반 스케치 동계 훈련용이나 재료소진용으로 평가절하한 것이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등산을 인생에 비유하고 골퍼들은 골프가 인생이라 하듯 누크를 하다 보면 누크 또한 인생이다. ‘쓸데없이 치장하지 말기’ ‘그냥 놔두기’ ‘기본에 충실하기’, 일상에서 부르짖던 구호들은 누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누크는 선과 각, 면이라는 기본요소만으로 충분하지만 문제는 탄탄한 기본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급한 마음은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이것저것 딴짓을 하게 되고 결국 ‘이게 아닌데’가 된다.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덮기에 급급해서 더 큰 화를 부르는 우리네 인생과 다를 게 없다.

        


누크의 시간은 짧게는 초 단위에서 길게는 5분, 정하기 나름이지만 대체로 1분, 2분, 3분 포즈를 선호한다. 시간에 따라 눈의 움직임이나 손놀림의 속도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 3분은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1분은 광풍이 휘몰아치듯 손을 놀려야 한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시간은 1분과 2분, 특히 1분 포즈에서는 손은 이미 내손이 아니다. 누군가의 조정에 의해 움직이는 듯, ‘못 그려도 고(go)’다.  그리고  본품보다 나은 사은품이 있으니, 그것은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는 느낌이다. 어디가서 그 맛(?)을 볼수 있을까싶은..

누크의 시간에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내 손과 모델만이 존재한다. 오직 하나의 화두에 몰두하는 이 순간은 선(選)의 경지와도 닮아있다.


행복한 과정을 주었음에도 누크의 마지막은 찢는(찢지는?)것이다. 이름하여 장렬한 전사. 쫘악~ 종이 찢는 소리는 내겐 일종의 카타르시스, 그림보다 쉽게, 더 많이 찢을 수 있다는 것은 누크의 마지막 덕목이다. 그렸으면 된 , 진정한 재료소진은 남기는 것이 아니니까.

과정과 결말이 딱 내 스타일,  누크는 당분간 계속되리라는기분좋은 예감,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의 소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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