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경함이 삶에게 주는 것
‘사피엔스’라는 책을 읽으며 초반부에 나오는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경제적 가치가 없는 ‘꽃’을 선물하는 동물, ‘사피엔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문화적인 학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만을 동경하고 그것에 정신을 기꺼이 내어놓게 되는 이유가 뭘까.
만다라, 꽃, 보석, 빛 등이 우리에게 주는 감정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몇 달 전, 계획되어 있던 촬영이 무산되면서 이틀의 공백이 생겼다.
누군가에게,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무 계획도 없는 이틀의 휴가가 얼마나 달콤한 시간이 될는지 알고 있지만,
당시 나의 마음에는 약간의 속상함이 놓였다.
기대했던 촬영이기도 했고, 배우에게 그런 기회가 달큼한 유혹처럼 느껴졌을 테니, 입 안에 거의 들어올 듯 닿았다가 빼앗겨 버린 솜사탕에 마음이 헛헛했달까.
속상함은 억울함으로, 억울함은 약간의 뜨거운 어떤 것이 되어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마음이 덴 걸까, 두세 시간 잠을 설치고 일어난 것이 새벽 6시였다.
마음을 달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미 옷을 입고, 가방을 둘러매고 나가며 어디로 갈지, 누굴 만날지 생각하다 보니 마음이 시원해졌다.
몇 년 만에 불쑥 연락한 친구는 완주 어느 시골에서 아내와 살고 있었는데, 당일은 어렵고 다음 날, 부부의 집으로 초대했다.
마음이란 참 새침하고 변덕스러워서 종잡을 수가 없으니, 만약 내게 너무나 예쁘고 귀엽지만 제 멋대로인 딸아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달래는 것이다.
고새 마음은 신이 나서 나의 이틀은 이미 단내가 나고 있었다
첫날은 걸었다. 전주에 도착해서 값싼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고, 걷다 와인도 마시고 책도 읽고, 취기가 오르면 또 걸었다.
갈대밭, 하천 옆을 걸으며 눈이 날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낯선 타지의 ‘이방인’이 되었다.
딱히 정해놓은 일정도 해야 할 일도 없고, 누구든 만나게 되면 헤어져야 하는 시간도 없고, 만약 마음이 맞다면 마음에 있는 것들을 언제든 쏟아낼 준비가 된.
상대와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니 후회도 반성도 고민치 않고 솔직해지는 것이다.(보통은 그런 사람과는 다시 만나더라.)
결국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서 하루 종일 걷기만 했지만, 그런 마음 자체가 나에게는 보통 신나는 것이 아니었다. 내적 흥분 상태랄까.
늦은 밤까지 걷다 설레다 잠들어, 아침 일찍 완주로 향했고 약속보다 빨리 도착해서 시장을 걷고, 눈길을 걷고, 대나무 숲을 걸었다.
친구 부부와 고기를 구워 먹고, 화암사라는 절에 올랐는데 일몰이 가관이었다. 전율이 일었다.
순간적으로 깊은 몰입을 했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마치 자다가 깨어나서 꿈을 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많은 작용들이 겹쳐서 그런 결과를 이뤄 냈겠지만, 그 순간은 그 후로도 여러 날을 고민케 했다.
아름다움, 매혹, 완전한 몰입, 명상, 현존. 여러 말로도 바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 날 낯선 나라의 이방인이 되고 싶다는 밑도 끝도 없는 바람이 어느 시골, 산속의 절에서 이뤄진 것이다.
생경함은 비교적 접하기 쉬웠다. 그것은 패턴이 무한이 반복되며 계산되지 않거나, 완벽한 대칭이거나, 거대하거나, 계속해서 변하는 것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이었다.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기차를 봤을 때, 처음 아이스크림이나 소금, 레몬을 맛볼 때,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을 때 짓는 표정을 보고 나까지 덩달아 행복해지는 그것이었다.
생경함을 자주 느끼고, 그것을 느끼는 상태를 인지한다면 나는 더 이상 늙지 않을 것 같았다.
늙지 않는다면 죽음에서 멀어지고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젊음’이며 삶을 대하는 우리의 순간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알 수 없는 것, 처음 보는 것, 계속해서 변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낀다.
판단할 것도, 판단할 수도 없기 때문에 사고가 멈추고 잔여 했던 생각들이 깔끔하게 사라진다.
마침내 그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 그동안 머릿속에 고여 날 무겁게 누르던 생각이 날아갔음을, 환기되었음을 느끼는 것이다.
글, 연기, 그림을 잘하고 싶어서 기능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내놓은 것과 도저히 하지 않고는 못 배겨서 해 버린 그것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어린아이처럼, 처음인 것처럼, 혹은 처음.
우리를 순간에 붙잡고 잠시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는 것들을 가까이할 것.
익숙함에서 벗어나 가변적인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
‘빛난다’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