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관계에 의해 일어난다
제목을 적고 나니, 동생이 훗날 이 글을 읽게 될지, 읽는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내게는 4살, 11살 터울의 여동생이 둘 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서러움의 상징인 ‘둘째’의 이야기이다.
사실 터울도 터울이지만 나 혼자서 남자였기 때문인지, 성인이 될 때까지 그렇다 할 왕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동생들에게 남(?)에게 하듯 친절했기 때문에 좋은 오빠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어릴 적부터 ‘좋은’ 말이란 말은 독차지하고 싶어 어쩌면 가식적인 행동까지 일삼던 나에 비해 동생은 정말 솔직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투쟁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비해 자연스레 얼굴 붉힐 일이 잦았다. 우리 가족 중에 가장 성격이 불 같고 예민했던 아버지를 똑 닮은 둘째였기 때문에 둘의 충돌은 불가피했고, 가끔은 아버지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황당하여있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둘째는 영리했다. 아마 첫째와 막내 사이에 끼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생각하고 또 행동해야 했을 것이다. 아버지께 애교로 용돈을 타 쓰는 것은 취미, 술에 취해 기분 좋은 아버지를 요리조리 구워삶아 평소 채워 놓았던 장바구니를 비우는 것은 특기였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내 탓에 둘째는 더욱더 당신의 성격을 닮아갔다. 당신의 예민함은 ’ 책임감‘이었다. 책임감은 어깨를 누르고, 긴 시간 무언가를 짊어진 사람에게는 작은 변화도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차저차 나는 집을 떠났고, 엄마와 동생 둘, 여자 셋이서 그 집에서 온기를 나눴다.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왕이 된다던가. 내가 호랑이는 아니지만, 동생은 가장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 더욱더 털을 곤두세웠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동생의 성격을 증명할 에피소드는 아주 많겠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니 생략하겠다.
오은영 박사를 만난 것도 아닌데, 동생은 어느 날 어른이 되었다.
동생과 나에겐 약간의 전우애가 있을 만큼 순탄하지만은 못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순탄치 못했던 시절을 함께 지나오고 나서는 사실 더 순탄치 못했다. 우리의 삶이 힘든 일만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은 아니지만,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그 힘든 일들 사이에 조카가 태어났고, 동생은 엄마가 되었다. 나는 ‘엄마는 위대하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 말이 엄마는 위대한 행동을 해야 한다기보다, 그냥 엄마라는 말 자체에는 위대함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동생이 엄마라는 존재가 되기까지의 그 간극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동생의 눈에는 깊이가 생기고 어른스러움이 생겼을까.
동생은 분리 수면이고 뭐고, 딸을 안고 살았다.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다나. 아마도 그것은 정말 순수한 사랑이 아닐까. 뭐든 순수한 게 좋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잘 모르는 어떤 그 깊고 맑은 감정이 동생의 눈에 담긴 것이다. 태어나 관계했던 사람이나 대상 중에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책임이 담긴 것이 있을까? 나나 동생이 가장 노릇을 해야 한다고 머리로 생각하고 괜히 예민해지고 그걸로 생색내는 뭐 그 따위의 입바른 책임감이 아니라, 어떤 너무도 약해 혼자서는 물도 제대로 못 삼키는 존재를 내가 돌봐야 한다는 그 책임과 사랑이 또 있을까? 엄마가 가끔 그런 말을 했더랬다. ‘어휴, 나는 애를 어떻게 키우는지 알지도 못했어.’ 세상이 아무리 좋아지고, 정보가 넘쳐나도 애를 어떻게 키우는지 누가 알려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랑을 상상도 못 해봤는데.
엄마는 원래 그런 줄 알았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그랬으니까. 그런데 동생이 엄마가 되는 걸 목도하고 나니, 엄마의 위대함이 피부에 와닿았다. 엄마는 우리를 키웠고, 우리는 엄마를 키웠다. 연애에서 관계를 잘하고 있다면 서로를 성장시킨다는 말이 있는데, 서로를 키우는 이 관계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관계가 아닐까. 조카는 하루하루 몸도 마음도 크고, 동생은 제 딸이 1그램 클 때마다 그것에 맞춰서 삶을 바꾼다. 육아는 전쟁이라더니, 전쟁을 치르니 일상은 너무도 여유로워 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동생은 날마다 어른스러워지는데, 나는 조카만 만나면 서로 공룡소리로 대화를 하니. 어휴.
(조카는 말을 굉장히 어른스럽게 잘하지만, 나랑만 만나면 새끼 고릴라가 된다. 물론 나도.)
나도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