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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민 Dec 14. 2024

여행의 규칙

편협한 사고가 낳은 낭만주의

 MBTI가 혈액형을 대신하게 되면서 성격 유형의 카테고리는 더욱더 다양해졌다. 그 와중에 섭섭한 F가 생기기도 했지만, 괴로운 J가 생기기도 했다. 뭐든 일단 나누기를 좋아하고 구분하고 정의하는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이보다 재밌는 주제가 또 있을까. 단지 분류하고 정의하는 기능을 넘어서 가까이 있던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도구가 된 것이 가장 긍정적인 효과일 것이다. 그리고 MBTI는 우리가 더 이상 하나의 가치를 지향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고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근면 성실의 시대는 지났다. 아니, 근면 성실 외에도 개성과 재치, 번뜩이는 아이디어, 웃게 하는 콘텐츠로도 충분히 사회 일원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은 어떨까. 어쩌면 MBTI가 아직은 수면 아래 있던 시절의 나는 내가 -N-P인 줄 당연히 몰랐고, 배낭여행이라는 낭만을 누구나 경험해 봐야 된다고 믿었다. 더군다나 첫 여행지가 인도였고, 40일이나 배낭을 메고 돌아다녔으니 '라테는 말이야'로 무장한 나의 여행 지론은 어지간한 꼰대 저리 가라였다. 그래서, 이 글은 여행의 길라잡이는커녕 참고할 만한 것도 없겠지만, 이런 사람도, 이런 지향점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것에 신기해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리고 분명 나 같은 사람도 있겠지. 반가워요.)


MBTI도 스마트 폰도 없던 시절, 유일하게 여행지에서의 목표를 알려주던 콘텐츠는 여행 책자였다. 물론 그때도 인터넷상의 정보는 넘쳤기 때문에 부지런한 제이(가명)는 여러 카페에서 정보를 모아 정리해서 PPT로 만들어 인쇄해 오기도 했다. 아무튼 종이로 된 정보는 변하는 상황에 따라서 갱신되기 어려웠고, 물에 젖거나 잃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말 그대로 그만. 그러면 여행을 그만둘 것이냐, 내가 그리워하는 가슴 뛰는 여행은 그때부터였다. 이제 이 도시에서 봐야 할 관광지가 뭔지를 모르니 냅다 걷는 것이다. 식당을 못 찾겠으면 물으면 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잃었다면 택시를 타면 된다.


40일의 인도 여행 이후 나에게 몇 가지 규칙이 생겼다.

 

- 시간이 허락된다면 내가 당분간 지낼 마을을 마음껏 돌아다닐 것.

- 이왕이면 높은 곳으로 가서 가보고 싶은 곳을 눈으로 확인할 것.

- 골목과 골목 사이를 걸으며 건물 주소가 표기된 '주소판'을 사진으로 남길 것.

- 그 나라 탈 것을 모두 타 볼 것.

- 길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지도는 보지 말 것.


'에이, 그건 관광이지~'


그때 묘한 여행 부심이 있었는데 진정한(?) 여행은 배낭을 메고서 거리를 활보하고 휴양이나 즐기는 대신 그 나라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며 웃고 떠드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누구나 같은 것을 원하고, 누구나 낭만을, 누구나 상상하는 것을 즐긴다고 생각했으니, '여행은 이래야 돼!'라는 생각이 생길 수밖에. 어쨌거나 나름의 규칙이 생긴 후에 나 혼자는 만족했으니 추억 거리도 많다. 지금에야 성격유형만큼의 여행의 종류가 있고, 어쩌면 그 이상의 삶의 방식이 있을 테니 각자의 낭만을 응원하게 되었으나, 그때 그 시절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은 얼마나 편협한 사고를 가졌었나 생각하게 된다.


정답은 없고, 이야기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여전히 나는 편협한 사람이지만 일관적인 편협함은 때론 삶의 단순함을 선물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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