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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민 Dec 26. 2024

사랑이 혼란을 야기하는 이유

나와 너의 구분을 방해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

얼마 전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무릎을 탁! 쳤던 부분이 있었다. 레빈과 키치의 신혼 생활에서 너무도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자주 다투고 상대에게 바라는 바가 생기는 과정에서 톨스토이가 묘사한 부분에서였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이유는 키치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레빈 자신이라고 생각해 버린데 있었다. 레빈은 자신이 상처받길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키치 또한 상처받지 않길 원한다. 둘 중 누구 하나 상처받지 않는 방식이 있다면 좋겠지만, 다들 알다시피 관계에서 상처를 주는 일은 불가피하다. 레빈은 키치의 아픔 또한 내 아픔이 되고 마는데, 그것은 상대가 나와 동일시되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나도 나고, 상대도 나다. 레빈은 혼란스럽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내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단수이지만, 외부에 나와 다른 내가 하나 더 있는 셈이니. 나도 아프기 싫고, 상대가 아픈 것도 내가 아프니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단 말인가.


동일시는 연인, 친구, 부모 관계에서도 쉽게 느끼는 감정이다. 너무나 가까운 나머지, 나의 욕망이 마치 상대의 욕망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내가 답답한 거지, 상대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다. 그러니 자꾸 강요하게 된다. ‘너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라며, 비수를 서슴없이 꽂게 된다. 너와 나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영원히 너와 내가 하나가 되길 바라지만, 그것은 사실 상대가 자신을 지우길 바라는 꼴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가능한 한 가깝지만, 동일시를 알아차릴 수 있는 최소 거리. 내 욕망과 상대를 구분하는 일. 상대가 하지 말았으면 하는 행동과 했으면 하는 행동이 사실은 내 마음에서 기인한다는 것. 그것은 절대 상대를 위하는 일이 될 수 없다.  


사랑해 마지않는 상대에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그것은 상대로부터가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된 감정이다. 그것은 나의 단서다. 나라는 커다란 퍼즐을 맞출 수 있는 하나의 조각이며, 앞으로 내가 사용해야 할 내 마음의 사용법이다. 내게 생긴 감정은 때때로 너무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다. 솔직하기엔 너무나 사소하고, 속 좁은 인간으로 비칠까 걱정해서 변명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정말 속 좁은 인간이 된다.


최초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 낼 때 우리는 단서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을 변명하고, 그럴듯하게 꾸미거나, 상대에게서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단서는 영원히 자취를 감춘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할 조각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런 경험이 쌓일수록 내 마음을 컨트롤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는 내 마음에 대한 제어를 잃고 변화를 두려워하게 되고, 구원의 손길을 찾아 타인에게 손을 내밀지만,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나뿐이다. 악순환이 반복되면 타인에 대한 의존도는 강해지고, 그 때문에 구원은 더 멀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잔소리를 행하는 사람은 아마 그 잔소리만큼이나 자신의 삶을 고치고 싶은 사람일 테다. 내 삶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만큼 상대에게 잔소리하게 된다. 심지어는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며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자신을 사랑하라고들 말하지만 정작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내 조각을 찾고, 그것을 마음의 퍼즐에 하나씩 끼워가다 보면, 퍼즐 조각이 많아질수록 난이도는 낮아진다. 퍼즐을 놓을 남은 공간이 적어질수록 명확해진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알아차린다. 상대가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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