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어렵지 않게 즐기는 방법
와인바에서 4년 동안 일했다. 운이 좋게 좋은 사장을 만나 자격증을 따는데 필요한 지원도 해주었고, 각종 시음회에도 함께 참석하며 단순 아르바이트 생에서 매니저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와인에 대한 이야기도, 인간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그토록 많이 한 적이 있었을까. 와인 마니아들과 와인파티를 열기도, 단순히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놀기도, 술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대화가 즐거워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끔은 그냥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냥’이라는 말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말로 담기 사소한 것부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들 사이의 간극에서 길을 잃으면 ‘그냥’이 된다. ‘그냥’ 온 손님에게 내가 건넬 수 있는 말이라곤 와인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어떠세요? 물으면 맛있어요, 답한다. 물론 와인바에서 소믈리에가 추천해 준 와인은 대부분 맛있다. 취향의 차이를 넘어서도 지금 상태가 좋은 와인이 무엇인지 우리는 대게 파악하고 있으니까.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폼을 잡고 있으면 ‘전 잘 몰라서요.’라는 말로 입을 닫고 귀를 열 준비를 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돈을 내고도 낮은 자세를 취하는 그들에게 나는 전하고 싶었다. 정말, 진짜, 그냥 쉽고 흥미롭게 와인을 즐기는 방법.
보통은 와인 하면 이름부터가 복잡해 보인다. 그리고 와인에 관련된 책들은 모두, 이 명명에 관한 것부터 시작한다. 생산자니, 포도니, 어느 밭이름이니 이런 건 사실 고가의 와인을 마시게 되면 내가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되는 것들이라 설명하고 싶지 않다. 삶을 사유하고 철학적 사고를 갖고 싶은 학생에게 철학자의 역사부터 가르치는, 이 나라의 교육방식은 무엇인가를 배우는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든다. 시초를 알아야 할 것 같고, 종류와 분류, 근거가 있는 해답을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불안감.
와인은 음료다. 포도로 만든 음료. 음료를 마시는 이유는 맛을 즐기려고, 혹은 맛을 더 잘 즐기려는데 있다. 와인에 빠지게 되는 요인은 ‘맛’도 있지만, 대부분 ‘향’이다. 포도로 만든 음료에서 어떻게 이런 향이 나지? 싶다면 와인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가리고 음료의 맛을 보면 맛을 잘 모를 때가 많다. 콜라와 사이다를 놓고 눈을 가리고 시음 후 맞추는 게임이 한동안 꽤 핫했던 걸 아는가. 눈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이 음료의 맛과 향을 예상하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뇌가 ‘예측’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아는 척하는 걸 좋아하듯, 우리의 예측이 맞으면 우리는 즐겁다.
콜라인지 사이다인지 눈으로 보면 알 수 있다. 어떻게? 색깔로!!
와인도 똑같다. 레드 와인이든 화이트 와인이든 원리는 비슷하지만 레드로 예를 들어보자면, 색이 어떤가 보는 것이다. 거기서 거기지. 보랏빛이다. 아니 붉은빛이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오묘한 색이다. 지금부터 와인을 자두라고 생각해 보자. 검은색에 가까운 보랏빛의 자두, 검 붉은 자두, 새 빨간 자두, 그리고 옅은 붉은 기가 돌기 시작한 자두. 이것들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익은 정도이다.
그럼 어떤 곳에서 자란 자두가 더 빨리 푹- 익게 될까? 덥고 해가 쨍쨍한 곳. 춥고 서늘한 곳에서는 아마 자두가 설 익겠지.
설익은 자두는 신맛이 난다. 푹 익은 자두는 당도가 높고, 껍질에서도 진한 맛이 난다.
이제 와인을 즐기는 일만 남았다. 마셔보니 이 포도가 자란 곳이 추운 곳인지 더운 곳인지 알 것 같다. 호주에서 온 와인을 마시며 호주의 날씨를, 프랑스 와인을 마시며 그곳의 날씨를 상상한다. 나라별로 기온과 느낌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이 대략 느껴지면, 그 나라에서 어떤 지역일지 상상해 본다. 예를 들어, 이태리의 부산? 이건 이태리의 의정부? 이태리의 강원도 추운 마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지역이름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즐기기 위해 마시는 거니까. 대충 이렇게 때려 맞추는 것을 즐기다 보면 서서히 알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뭔가 대충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겁 많은 완벽주의자가 많아서 뭔가 시작하는 데 있어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준비하다 때려치우는 것이 태반. 와인을 즐기기 위해 자격증부터 따본다거나 책을 사서 읽는다. 모르고 마시기 싫어서.
‘그냥’ 한 번 해보자. 그리고 상상하자. 정답이 없는 무척 피곤한 날, 낮잠 자다 꾼 개꿈 같은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자. 그러다 취하면 기분이 훨씬 좋을 테니까!
아 그리고 예의 차린다고 잔을 들고 와인을 받지 말고, 따라주는 사람도 흘릴까 바짝 긴장하고 있으니 잔은 그냥 바닥에 놓아두자. 따르기 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