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늦은(많이 늦은) 흑백요리사 후기
드라마나 예능, TV 프로그램들을 잘 보지 않는 편이다. 긴 콘텐츠에 대한 부담 때문일까. 짧은 콘텐츠들만 맛보고 결국엔 짧은 기승전결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도파민에 중독된 결과 일까. 글을 쓰기가 힘들고, 긴 호흡의 책을 읽기가 여간 쉽지 않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성향이 아니다 보니, 하나를 시작하면 정신없이 빠져드는데 그게 두려워서 이기도 하다. 서론이 길었지만, 그런 내가! 때 늦은 흑백요리사를 보았다. 오늘에서야 모두.
우리는 뻔한 데서 웃고, 뻔한 데서 운다
극단 생활을 할 때 연출이 자주 했던 말이다. 쉽게 해석하자면 기본에 충실하자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신박한 소재와 아이디어, 클리셰를 뛰어넘는 반전. 이런 것들은 최초의 한 번 일 때 가장 강력하다. 그것은 유행을 만들고 퇴색되거나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 클래식이 된다. 고전이 된다는 것은 당장 알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정말 낮은 확률의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일생을 울고 웃는다. 같은 이야기에도 반복해서 울고 웃고, 비슷한 이야기에도 울고 웃고, 심지어 남의 이야기라면 더 쉽게 울고 웃는다. 울고 웃는다는 것은 정도의 차이지만, 감동을 수반한다는 뜻이다.
일상에서 그렇게 잦은 감동을 느끼면서, 창작물에는 꽤나 날카롭다. 왜냐면 일상에서 그리 자주 느껴봤으니까. 논리로 설명할 수 없지만 감동에 관해서는 우린 전문가니까. 게다가 의심 많은 한국인이 가짜에서 쉽게 감동해? 말이야, 방귀야. 어차피 뻔한 이야기라면 진정성을 담아야 한다. 진정성을 담기보다 더 웃기게, 더 슬프게 만들면 웃픈 코미디나 신파가 된다. 연기뿐 아니라 모든 콘텐츠가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진정성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연기를 시작했을 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그 단어를 노트에 수백 번 적어보다가 깨달은 바가 있다. 진정성은 정성을 자주 갖는데서 온다는 것을.
그래서 흑백 요리사가 어땠냐고?
재밌었다. 아주. 100개의 진정성을 모아서 잘라내고 빚어내어, 단 하나의 그것이 남을 때까지 대결하는 게 재미가 없을 리가. 우리는 오감에 아주 민감하다. 특히 맛과 소리에는 너무나 쉽게 취약해지고 감동한다. 그러니 노래 경연대회나 요리 경연대회가 먹히는 거겠지.
제목부터가 끌리지 않는가. ‘흑백’이라니. 이분법의 가장 강한 지점은 세상 모든 것을 이 유일한 두 가지의 선택지에 구겨 넣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나 연예프로그램에서도 단골손님으로 나오는 게 이분법이고, 그걸 이간질했을 때 가장 큰 효과를 본다. 첫 경연부터 흑수저 요리사들은 1층에서 대결을 펼쳐야 하고, 백수저 요리사들은 2층 난간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는 장면의 연출은 이 제목이 품고 있는 ‘자 너네 선택지는 두 가지야, 어딜 응원할래?’에 가장 부합하는 부분이다. 자랑스러워하던가, 긁히던가 우리는 반응하게 될 수밖에. 흑수저 요리사 한 분, 백수저 요리사 한 분을 각각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터라, 그분들이 화면에 나왔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애초에 나는 흑이고 백이고 다 선택해 버린 노예가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100이라는 숫자를 기상천외하고 획기적인 방법으로 10자리 미만의 숫자로 줄여나간다. 그 과정에서 인물 하나, 음식 하나에 포커싱 되는 깊이가 깊어진다. 요리사들이 경악할 때마다 우리는 ‘방송국 놈들’을 질타하며 화면 앞으로 고개를 더 가까이할 수밖에. 요리 경연 대회니 요리하는 장면을 계속 써야 할 텐데, 지루할 만하면 충격적인 대결 방식이나, 인플루언서들을 대거 투입해 눈과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의도된 연출인지는 모르겠지만, 흑과 백의 결승, 영광과 발전의 대결이 펼쳐지고 막이 내린다.
아마 음식이기 때문에, 그리고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업가이자 요리사들이기 때문에 이 열기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절대 쉽게 놔주지 않을 것이다. 도태와 경쟁은 더 부추겨질 것이고, 단물은 빨리 빠지겠지만. 자본주의는 이렇게 살아남아왔다.
흑백요리사는 길게 승리하기 위해 자본주의에 노크하며 감동을 전해주는 효과적인 방식을 잘 취했다.
아니, 요리에 곁들이 사연에 눈물짓게 하는 서사라니. 예술과 상업의 차이는 역시 서사일까.
P.S 딤섬 먹고 싶다. 어떤 음식이 기억에 남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