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주는 정체성에 익숙해진 당신에게
처음엔 자신이 딛고 선 땅의 이름을 빌렸다. 부산 사나이가 되고, 벌교 사람, 서울 사람, 경기도민, 저마다의 지역 특성을 자랑삼았다.
시간이 조금 흘러 그들의 자식들은 자신의 회사의 이름을 빌렸다. 삼성맨, 현대인, 엘지인 등등의. 두 번째 이름 경쟁은 생각보다 치열했다. 더 높은 이름을 목에 걸고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기꺼이 내 정체성을 그들에게 반납했다. 지금은 우리는 어떨까. 우리의 정체성은 어디서부터, 누구로부터 오는 것일까.
초, 중, 고, 대, 군대, 대학 졸업까지.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남들처럼, 남들 따라 끊임없이 정체성을 부여받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끝없이 줄 세워진 같은 레일을 달리던 때에 나는 뒤쳐질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함께하는 이들이 있어 불안하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핑계 삼아 줄지어 달려가던 레이스에서 하차했다. 어릴 때부터 끼가 남다르다거나, 모델하라느니, 연예인 하라느니 하는 소리는 솔직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좀 별나긴 했지. 몸에 있는 흉터로 책을 쓸 생각을 했었으니.
배우가 되겠다 선언했을 때, 물론 그것은 허락을 구하는 행동은 아니었으며, 심지어 먼저 집을 나가라고 한 건 엄마였다. 아무튼 그때 나는 삶에서 누군가 정해놓았다고 믿었던 목차에서 스스로 탈락했다. 서울 상경 후 얼마간은 새 삶을 선물 받은 것 같았고, 아르바이트와 병행하고는 있지만 멋진 배우가 될 거라는 희망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연습하고, 일하고를 반복했다. 곧 극단에도 들어갔고, 좀 부끄럽긴 했지만 스스로 배우라고 소개하며 다녔다. 물론 내 생계를 유지해 주는 것은 아르바이트지만, 언젠가 멋진 배우가 될 테니까.
나이 앞자리가 바뀌고 나서는 ‘아르바이트’라는 말을 붙이기가 조금 민망해졌다.
나는 매니저가 되었다. 야구기록관이 되었고, 대리 기사, 배달 기사, 선생님, 강연자, 로프공이 되었다. 여전히 언젠가 연기로만 먹고살 수 있는 배우를 꿈꾸며.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세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떠오르는 멋진 말도 많지만 나는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이렇게 십여 년의 시간을 돌아보니 누군가에겐 안타깝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나는 프로 이직러, 만능꾼이 되었다. 배우라고는 하는데 도대체 어디 나오지는 않고, 전국으로 강연을 다니더니, 오랜만에 만나서는 로프를 타고 고층 창문을 닦고 있다고 대답하는.
로프를 타며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긴 시간 줄에 매달려 내려오면서 많은 대화를 나눈다. 유난히 힘든 날 ‘공부 좀 더 하지 그랬냐’는 농담이 내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유쾌하게 보내지만, 시선을 좀 더 멀리 두고 이야기할 때, 그러니까 삶의 어딘가가 아니라 삶의 허공을 이야기할 때. 가령 내 삶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에 대한 대화를 하게 될 때. 다채로운 회한을 보게 된다.
많은 직업들에서 그랬다. 저마다의 일터에서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 그것이 자신의 삶인 양 굴었다. 변화 가능성은 제일 먼저 닫아두고, 그곳에서 어떻게 버틸까를 먼저 고민했다. 그럴 때마다 생각 없이 즐기고, 그러니 일을 곧 잘하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다. 결혼, 집, 차, 미래를 화살에 달아 내게 쏴도, 내겐 무적의 방패가 있었다.
배우라는 꿈.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나는 돈을 벌기 위한 일과 꿈을 위한 연기로만 나눠서 살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삶에서 배우라는 이름을 지워도 내 삶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사실을 지금껏 모른 척하며 내가 외치지 않으면 남들은 절대 알아주지 않는 ‘배우’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되뇌고, 새기고, 말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었고, 나는 스스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에 능통한 사람이 되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장마와 한 겨울엔 책방을 운영하고, 그 외엔 로프를 타는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