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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ssueproducer Apr 25. 2020

[Ep2-25]오페라하우스 앞에서 와인 한잔해

<한국이 싫어서> 문학기행, 아홉번째 이야기

잠깐 퀴즈! 시드니에 온 계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1.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사진찍기 2. 호주 와인 마셔보기 3. 외국에서 우연히 남자 만나기 4. 어학원 등록하기 중 무엇일까? 정답은 바로 어학원 등록이다. 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 보기도 같은 날 하루 만에 다 해치운다. 어학원에서 우연히 재인이라는 남자를 만나고, 얼떨결에 오페라 하우스를 같이 가게 된다. 드넓은 남태평양을 배경으로 20세기 최고의 건축물이라 칭하는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사진도 찍고, 진짜 호주에 왔다는 감상에 젖어있을 때쯤 재인이가 술을 권한다.


이 느낌 그대로 호주 와인을 호로록 마시면 눈물이 또르르 날 것만 같은 벅찬 마음이건만, 그가 권한 건 노천 카페의 폼나는 와인 한 잔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 한국 감성이 남아 있었나 보다. 한국에서 소주랑 안줏거리 사들고 해수욕장에 앉아 밤바다를 보는 맛을 못 잊었던 건지, 계나에게 마트에서 술과 안주를 사와 바닷가에 앉아서 먹자고 권했다. 그들은 그렇게 마트에서 3,000원도 안하는 2리터 짜리 종이 팩에 담긴 와인과 나쵸칩을 사서, 도스 포인트 공원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고 오페라 하우스를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지도만 봐도 하버 브리지부터 오페라 하우스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라는 걸 알 수 있다. 거기에 와인까지 홀짝거리니 그 풍경이 오죽 아름다웠을까.


오페라 하우스는 하얗고, 그 앞에 하버 브리지라고 검은색 다리가 있고, 하늘은 물감 풀어놓은 것처럼 파란데, 그보다 더 진파랑인 바다에는 햇빛이 반짝반짝 부서지고, 거기에 또 흰 요트가 있고, 흰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중략) (p.43)


도스 포인트에서 내려다보면 하버브리지부터 오페라 하우스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이런 좋은 분위기에서 계나와 재인이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호주는 야외에서 그렇게 술병이 보이게 들고 마시면 위법이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가 나중에서야 알고 깜짝 놀랄 만큼 어리바리한 호주 초심자였다. 심지어 시드니는 길거리 음주에 대해 특별히 더 엄격한 편이다. 한국이야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거의 모든 종류의 술을 손쉽게 구할 수 있지만, 호주에서 바틀샵이나 바처럼 지정된 업장에서만 알코올 판매와 구매가 가능하다.


술꾼님들, 그렇다고 호주 여행을 포기하진 마세요. 술병이 술병이라는 걸 들키면 안 될 뿐, 종이 가방 같은 거로 감싸서 술병인지 모르게만 하면 길에서 술을 마셔도 되니까요. 뭐지, 이 눈 가리고 아웅은? 알코올 섭취를 제한하는 것이 목적인지, 이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에 술병이 보인다는 게 미적으로 거슬려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생각할수록 의구심이 들지만 계나는 호주에 왔고, 호주의 법이 그렇다니 따라야지 뭐.


계나와 재인이는 술잔도 없으니 종이팩 양쪽에 구멍을 내어 번갈아 홀짝였다. 세상에 고급지고 좋은 와인이 많고 많은데 싸구려 와인이 객관적으로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겠느냐만, 계나는 이 소박한 새로움 앞에서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낀다. 특유의 느긋한 분위기 때문일까.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는 호주에서의 일상에 하나씩 마음을 주게 된다. 계나가 호주의 첫인상을 꽤 괜찮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이때의 나른하고도 풋풋한 마음이라면 앞으로의 호주 생활도 긍정적이고 씩씩하게 해갈 거라 그려진다. 반대로 한국에서의 생활이 더 힘들었던 이유는 현재의 어려움을 버티며 떠올릴만한 과거의 설렘과 즐거운 기억들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오래전부터 계나를 지배하던 주된 감정은 불안함이었지만, 늘 참고 버티기에 항상 날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술도 누구와 어디서 어떤 마음으로 마시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미각을 불러온다. 편한 친구들과 즐거운 자리에서 함께 마시는 술은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술술 들어가지만, 불편한 상사나 싫어하는 사람과 억지로 마시는 술은 아무리 비싼 술이라도 맛없고 먹기 싫다. 만약 내가 이 사람이 좋은지 싫은지 헷갈리면 같이 술을 마셔보는 걸 추천한다. 몸이 알아서 답을 정해줄 테니.


요런 느낌적인 느낌이었으려나?


계나는 호주에서 매일 몸을 움직여 일해서 정당한 보수를 받고, 그 돈으로 공부도 하고, 집세도 내고, 와인 한잔을 사 마실 수 있는 삶이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오페라하우스와 하버 브리지가 더해진 예쁜 풍경까지 있으니 더 좋았고. 무엇보다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가면 영주권도, 시민권도 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가장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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