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폴리오 '트래블'은 작가와 함께 폭넓은 스테이 경험을 소개하는 콘텐츠입니다.
글ㆍ사진 ㅣ 신은지
가을은 자꾸만 조바심을 내게 만든다. 이 풍요로운 계절이 금방 떠나가버릴까 초조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들을 더 많이 보고, 소중한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다.
어디를 걷든 기분이 좋고 무엇을 하든 만족스럽다. 하지만 나에게만 아름다운 계절이 아니고 모두가 사랑하는 계절이므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사람이 몰리는 곳을 피해 이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어디로 떠나야 할지. 계절마다 여행을 떠나는 우리 가족. 이번 가을의 목적지는 '양양' 이었다.
아빠의 오래된 차를 타고 덜컹이는 도로를 지나, 인제 가을 꽃축제장을 들리고, 높이 솟은 설악산 울산바위도 감상하며 양양으로 향하는 길.
달에 한 번은 여행을 떠나지만 의외로 여름의 양양은 낯설다. 왠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활기와 북적이는 인파가 가득할 것만 같아 여름에는 양양에 놀러간 적이 없었다. 가을의 양양이 좋다. 하조대 해수욕장 앞에 내려 주변을 둘러본다. 한산하고 운치 있는 바닷가를 보니 역시나 만족스럽다.
하조대 해수욕장은 서피비치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지만, 동네의 인상은 완전히 다르다. 순박하고 조용한 분위기. 많은 이들이 양양을 핫플 그리고 밤 문화의 중심지로 알고 있는데 하조대는 그저 작은 바닷가 마을 같다. 오늘의 거처가 되어 줄 숙소는 이 차분한 바다를 배경 삼은 '일기일회'. 하조대 해수욕장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체크인 시간은 3시. 점심을 먹기 위해 숙소 일기일회에서 4분 거리에 있는 '싱글핀 에일웍스'에 들렸다. 양양에 올 때마다 먹지만 먹을 때마다 맛있다. 시카고 피자를 페퍼로니와 쉬림프로 주문하고 저 멀리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드디어 다가온 체크인 시간.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은 조경을 지나 뒤쪽으로 돌아가면 넉넉한 크기의 주차장이 나타난다. 차를 대고 주변을 둘러봤다.
일기일회는 우리만의 한가로운 시간에 집중하고 싶었던 가족 여행의 목적지로 아주 알맞았다. 호스트님은 핫플로 여겨지는 양양의 이미지와 반대되는 정적인 공간을 만들고 싶으셨다고 한다.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장식이 배제된 담백한 콘크리트 마감, 그리고 시원시원하게 뻗은 직선의 구조물이 일기일회가 어떤 공간을 지향하는지 직감하게 했다.
올초 론칭한 일기일회는 오픈 직후부터 양양 오션뷰 숙소로 많은 여행자의 관심을 받았다. 아마도 과감하게 절제되고 비워낸 공간이 바다를 가장 온전히 향유하는 형태라고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기일회의 건축을 담당한 사무소효자동은 바닷가 호텔의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바다의 촉각을 공간 내부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일기일회는 독특하게도 각 층마다 넓고 긴 콘크리트 복도를 내고 사방을 다 열어 두었는데, 이는 한옥 처마 밑의 툇마루처럼 역할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양양의 자연을 마당으로 삼은 호텔이라니.
오늘 머무를 객실은 'Presidential Suite' 룸으로 일기일회 최상층에 위치해 있다. 최대 6인까지 숙박 가능하고, 바다를 향해 열린 넓은 테라스를 모두 사용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 현관 입구뿐 아니라 층 진입 시에도 카드키가 필요해 한 층 전체를 프라이빗하게 이용하게 된다.
내부로 들어서면 저도 모르는 새 작은 탄성이 나온다. 한 면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파노라마 오션뷰. 그리고 키가 작은 우리 엄마의, 2배 정도 되어 보이는 높이의 압도적인 천장고. 여기에 고급스러운 화이트 오크 톤이 어우러져, 절제된 미니멀 무드 가운데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객실에 짐을 풀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운이 좋게도 오늘 빈 객실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일기일회는 19개의 룸으로 구성되는데, 층마다 구성을 다각화해 다양한 여행자의 니즈를 만족한다. 객실은 창밖을 보며 자쿠지를 즐길 수 있는 Bath, 차 한 잔의 휴식에 집중할 수 있는 Dado, 규모 있는 공간으로 보다 여유로운 쉼이 가능한 Suite 타입으로 나뉜다.
그리고 층별로 인원 수와 평면이 조금씩 달라진다. 2-3층에는 3인 객실인 Family 룸, 4-5층에는 2인 객실인 Stay 룸, 6층은 4인까지 숙박 가능한 Junior 룸이 있다. 층과 룸 타입에 따라 공간 특징이 달라서 선택지가 넓다.
다시 객실로 돌아와 여유를 즐겼다. 바다가 하나의 작품처럼 바라다보이는 창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조대 해변이 참 아름다운 곳이라는 걸 느꼈다. 평화로운 동네다. 아직 상업적으로 개발된 곳이 아니라서 좋고, 동시에 특색 있는 공간 몇몇이 곳곳에 숨어 로컬을 탐험하는 매력이 있다.
부모님은 연신 바다를 보고, 듣고, 쉴 새 없이 핸드폰으로 사진을 남겼다. 부모님과 오기에는 일기일회가 특히 좋은 선택일 것이다. 거치대부터 휴지통까지 사소한 디테일도 톤을 맞춘 고급스러운 동양풍 인테리어와 그 너머로 교차하는 오션뷰에 엄마의 탄성이 끊이질 않았다. 작년에 엄마 환갑이셨는데, 기념 여행을 이곳에서 했다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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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일몰과 일출을 Presidential Suite 룸에서 모두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무척이나 호사스러운 경험이다. 공간의 양옆이 통창으로 트여 있어, 거실에서는 일출이 보이고 침실에서는 일몰이 보인다. 일몰 뷰는 구불구불 뻗은 산맥과 노랗게 익은 밭이 보이는 풍경이다.
2개의 침실은 욕실을 사이에 두고 동일한 구조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두 룸 모두 드라이기와 거울, 행거, 스탠바이미가 준비되어 굉장히 편리했다. 킹 사이즈의 침대는 체감상 더 큰 사이즈로 느껴진다. 이렇게 넓고 편안한 침대에서 자는게 얼마만이었는지.
개인적으로 스테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간은 욕실이다. 위생이 중요한 공간인 만큼 청결함과 편의성도 주의깊게 살피지만, 구조적인 측면에 큰 흥미를 느낀다. 집 같은 생활공간에서는 욕실이 무척 제한된 구조이기 때문에 스테이에서 새로운 감각을 얻을 때 참 즐겁다.
침실 사이에 있는 욕실은 복도식 구조인데, 세면 공간이 창밖을 향해 아일랜드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풍경을 감상하며 손을 씻을 수 있는 점이 재밌다. 바깥은 유리 난간의 테라스이기 때문에 시야가 방해되는 것도 없었다. 손잡이가 편리한 일기일회 컵, 아로마티카 어메니티가 준비되어 있다.
편안한 침실과 쾌적한 욕실. 자고, 씻는 것 같은 예민한 부분을 세심히 챙겨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맞은편에 있는 침실. 여기서도 바다가 잘 보인다.
거실 중앙에는 간단한 음료와 먹을거리를 준비할 수 있는 바 공간이 있다. 드립백과 티백, 그리고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물은 미세플라스틱 걱정을 덜어 줄 해양심층수 SNOK. 하조대 인근에 위치한 레스토랑 더스탠드의 샴페인잔, 싱글핀 서핑 강습 할인권 등도 비치돼 있었는데 로컬 숍과의 상생을 추구하고자 하는 일기일회의 의도가 와닿았다.
일기일회는 욕실 두 곳 모두 샤워 시설을 갖추고 있어 한층 여유롭게 씻을 수 있다. 거실 옆 욕실은 하조대 해변이 한눈에 보이는 고즈넉한 풍경을 액자 같은 창으로 담아낸다. 씻거나 양치하는 일상적인 행위도 이곳에서는 특별해진다. 테라스 가장자리에 작은 이끼 정원이 있는데 욕실에서 바라보면 바다를 배경으로 작은 섬이 둥실 떠 있는 듯한 풍경이다. 미니멀하게 비어 있지만, 따듯한 감성은 촘촘히 채워주는 공간.
일기일회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는 다시 바다가 잘 보이는 거실에 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문득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 이 풍경을 함께할 수 있어 참 감사했다.
일기일회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공간이다. 다도에서 유래한 단어로, 지금 마주한 순간은 되돌아오지 않으므로 차를 대접하는 주인과 손님 모두 정성을 다해 임해야 한다는, 소중한 인연과의 시간을 오롯이 대해야 한다는 철학적인 의미가 담겼다. 우리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 옷깃이 스치는 관계란 우연히 마주한 이들이 아닌, 일상을 공유하며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과 가능한 관계라고. 이 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바람이 잠잠한 틈을 타 창문을 열어 두었더니 이번엔 바다소리가 좋아 해가 지고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렇게 비움의 시간을 즐기다가, 배가 고플 무렵 근처에서 회를 사 왔다. 차로 조금 떨어져 있지만 소 사이즈라고 믿기지 않는 양의 싱싱한 모둠회가 있는 '양양회포장' 추천.
각자의 침실로 들어간 우리는 스탠바이미로 저마다의 나이트 루틴을 즐기다 잠에 들었다. 일렁이는 파도가 빚어낸 건강한 도파민 덕분인지 오랜만에 푹 잤다.
눈 깜빡 한 번에 맞이하고 만 새벽 5시 30분. 오직 바다와 다도를 위한 비움의 공간일진대 왜 이렇게 할 일이 많은지 모르겠다. 사방이 트인 공간. 이곳에서라면 모든 해의 궤적을 좇을 수 있다는 생각에 욕심이 많아진다. 매 시간마다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엄마와 아빠는 붉어지기 시작한 하늘 너머를 일찌감치 바라보고 있었다.
태양은 참 부지런하다. 어둠에 잠긴 세상이 순식간에 밝아지는 장면에 신비로움을 느끼며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셨다.
아침을 깨우기에는 따듯한 차만한 것이 없지. 준비된 다구를 따듯하게 달구어 차를 우려냈다. 한 발짝조차 일찍 나서기 아쉬워 가만히 체크아웃을 기다리는 시간. 조금 더 노랗고 느긋한 모습의 아침 바다를 눈에 담으며 평화로운 분위기를 즐겼다.
가족에게 쉼을 선물할 수 있어서 기뻤다. 우리 가족에게 더없이 알맞은 형태의 휴식이었다. 늘 그렇듯 많은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다만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우리가 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서로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주 고요하고 비어 있는 쉼, 하지만 우리의 경험과 추억은 충만해졌다. 마음을 비우고 바다를 채운다. 또 일상을 가뿐히 비워내야 할 때가 온다면, 선뜻 양양으로 날아와 일기일회에 또 다시 머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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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er 신은지
공간을 통해 세상을 읽는 뚜벅이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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