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노련하고 완성도 있게 해내는 일을 꼽으라면, <술 버리기>다. 올림픽에 술 버리기 종목이 있다면 기술, 표정, 완성도 쓰리콤보로 점수를 받아 벌써 금메달을 땄을지도 모르겠다. 2022년 올림픽엔 환경보호 차원에서 쓰레기 줍기 종목이 생긴다는데, 간 보호를 위해서라도 술 버리기 종목이 생기길 간절히 바라본다.
아, 참고로 아까운 술을 항상 버리는 건 아니다. 술을 버리는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술을 덜 마심으로써 정신과 건강을 챙기는 것이고, 둘째는 술이 동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술자리도 빨리 파하기 위함이다. 물론 즐거운 술자리에선 밤새도록 들이부어도 좋다. 지난주 일요일 저녁에 벌어진 끔찍한 술자리 같은 경우에서만 술 버리기 기술을 발휘한다.
일요일 오후 6시, 지독한 술과의 전쟁에서 나의 재능으로 당당히 승리할 것을 다짐하며 연남동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술을 버린다 해도 싫은 술자리는 나가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랄까... 약속 장소에 다다라서도 주변을 빙 둘러 문 앞으로 갔다가, 가게 앞 놀이터에서 하늘도 봤다가,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다고 착한 거짓말(?)을 해볼까 하다가 일행을 만나 끌려 들어갔다. 이 전쟁의 장군인 줄로만 알았는데 포로처럼 끌려 들어갔다.
자리 구성원은 이렇다. 같은 프로그램 피디, 출연자 두 명, 포로 한 명. 출연자 A는 선한 눈빛으로 최면을 걸듯 술을 콸콸콸콸 따라주는 사람이다. 출연자 B는 하필 아내가 미국으로 출장을 가 집에 늦게 들어가도 된다며 (눈치도 없이) 50도가량의 커다란 술을 한 병 들고 왔다. 같은 프로그램 피디는 말해 뭐해.. 술 마시면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스텝 원.
우선 술을 버리려면 술을 강권하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앉으면 앉을수록 좋고, 어려울 경우엔 마주 앉는 것이 좋다. 또 가장 안쪽 자리를 선점하는 것도 포인트다.
첫 잔을 50도가 넘는 이과두주로 시작했다. 처음부터 목구멍으로 불화살이 날아 들어올 경우, 우선은 안주로 불씨를 꺼뜨릴 수 있겠다. (일단은 그냥 마시라는 소리다.) 그렇게 한잔 두 잔 석 잔을 넘어 몇 잔인 지도 알아채지 못할 타이밍을 노려야 한다. 안쪽에 앉은 이유는 다음과 같다. 휴지 곽은 대개 자리 안쪽에 배치돼있는데, 입은 닦거나 코를 푼 휴지를 곽 옆에 (모두의 시선을 피한 사각지대를 노려라) 쌓아 올린 후 살짝 씩 흘리는 전략이다. 출연자 A의 큰 눈망울이 풀어질 때 특히 과감하게 뿌렸다. 1차 대전에서 상대방의 눈을 피해 술을 버리게 될 경우 극도의 긴장감이 요구된다. 덕분에 정신도 말짱해지는 효과가 있다. 그렇게 내 정신만은 챙기고 2차 대전으로 향했다. 나만 멀쩡하다는 건 이동하면서 알게 됐다. 택시에서 내리면서 출연자 A는 지갑을, 피디는 휴대폰을 두고 내렸다. 겨우겨우 택시 기사님의 번호를 알아내 회수 후 다시 전쟁의 막이 올랐다.
사진 출처: 처음처럼
스텝 투.
일행이 정신을 못 차릴 타이밍에는 건배 후 맛만 보고 은근슬쩍 내려놓는다. 건배는 내가 먼저 유도하는 것이 좋다. 회전율을 높여라. 그러나 상대방이 눈치를 챈다면 그냥 털어 넣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주종이 바뀌었다. 소주와 맥주를 섞어 환각의 효과를 한껏 높여주는 음료를 제조해야 한다. 계속 들이키다 보면 환시로 인해, 소주를 조금 더 많이 섞어도 눈에 띄지 않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때부터 제조는 내 손에 맡겨야 한다. 하지만 나도 알코올의 힘에 밀렸는지 손이 삐끗했다. 어쩌다 보니 출연자 B의 잔에 유독 소주를 많이 따랐다. 그렇게 2차에서 B는 기다리던 외박의 꿈을 못내 이루고 안전귀가를 하게 됐다. 남은 건 노래방 타령이 특기인 출연자 A와, 차라리 취하려면 곱게 취했으면 하는 같은 팀 피디였다.
지난번 술자리에서도 노래방 안 간다고 울던 64년생 A 씨의 얼굴이 떠올라, 이번엔 함께 해주기로 했다.
스텝 쓰리.
노래방의 경우 얼음 통을 주는 곳이 많다. 얼음 아래는 잘 보이지 않으므로, 다들 신나 있는 틈을 타 신나게 율동을 하듯 통에 술을 들이부어라.
하지만 곱게 취하지 못한 피디에게 그만 들킬 뻔했다. 얼음 통에 술을 끼얹던 손목 스냅이 피디의 판독 비디오에 포착돼 감점... 될 뻔했는데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얼음 통에 술을 따라먹는 게 맛있다며 태연하게 들이켜버렸다. 그렇게 노래방을 거쳐 4차까지 갔을 무렵, 두 명 다 주어와 술어가 따로 노는 문장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단계임을 예감하며, 홀로 생맥주를 한 잔 시켜 들이켰다. 그 어느 때보다 시원한 맛이 혀끝에서 찰랑이다 식도를 지나 증발했다. 지난 전투의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아, 이래서 술을 마시나 봐.' 생각이 들었다. 시루떡처럼 퍼진 둘을 각각 택시에 던져 넣고 하늘을 봤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져서 그런지 새벽 5시인데도 대낮처럼 밝았다. 땀방울이 이마로 주르륵 흐르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