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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tenjohn Sep 01. 2016

지나가는 쉬운 약속

노상 습득 노트 탐독기 2


 일어나기는 조금 이른, 하지만 이미 해가 뜬 아침이었다. 새벽까지 눈을 감았다 떴다 뒤척이며 잠이 들었으므로 아침이라고 한들 그렇게 정신이 맑지는 않았다. 더 자기는 애매하고(다시 깊이 잠들어 버리면 낭패이므로) 이대로 일어나기는 뭔가 아쉬운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기왕지사 눈을 떠버린 것, 기십 분 일찍 하루를 시작할까, 아니면 결코 손해 보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일어나야 하는 최후의 마지노선까지 기지개를 미루고 미루다 시간이 도리어 평소보다 지나가서야 일어날 것인가.

 이럴 때 사람들은 종종 우연에 기대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하는데, 오늘 내가 기댈 우연은 바로 주운 노트였다. 나는 노트의 다음 장을 펴본 후, 너무 길거나 혹은 짧지 않다면 그것을 읽은 후에 일어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혹은 유감스럽게도) 노트의 다음 장에는 그렇게 읽기 부담스럽지 않은 길이 정도의 글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 모서리를 드르륵 퉁겨보다가, 접힌 책 모서리를 발견했다. 책갈피가 없을 때 나도 자주 하는 일. 물론 같이 보는 책에 그러면 안 되겠지만. 그리고 이것이 펴지지 않은 채 다시 책장에 꽂혔다는 것. 다시는 펴보지 않은 채 펴보겠노라 마음먹은 것.     

 내가 앉은 테이블 건너편에 몇 달 전부터 스칠 때마다 언제 한번 보자고 했던 네가 앉아있다. 어쩌면 나는 이곳을 나서다가 너를 또 마주칠 수도 있겠지. 그럼 넌 또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들면서     


 안녕!     


 하고 인사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언제 밥이나 먹자!     


 언제, 언제, 언제? 접혀있는 책 모서리에는 언제 다시 만나자는 기약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여기까지 읽었다는 표시일 뿐, 아니면 이곳엔 중요한 무엇이 숨겨있다는 징표, 무엇인가 다시 찾을만한 소중한 것이 있다는 암시.

 무엇이 중요했단 말인가, 내게 ‘언제 밥이라도 먹자’ 하던 그 순간의 기억에는 아무리 생각 봐도 중요한 일이라거나 소중한 일은 없었는데.

 그렇다고 딱히 섭섭한 것은 아니야. 세상은 쉽게 부서지고 미뤄지는 약속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

.

.

 이를테면, 난 오늘 알람을 세 번이나 다시 맞췄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잠시 움찔하였으나, 그렇다고 곧바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직 기상(起床)의 데드라인은 몇 분이나 남아있었고, 오늘의 기상 시간에 대해 나와 약속한 바도 없었기 때문에. 어떤 것도 약속하지 않았지만 일어나야 하는 데드라인이 있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뭔가를 약속한 건가, 아닌가. 암튼, 




 나는 살면서 무엇을 가볍지 않게 대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내가 열심히 들여다본 것을 생각해보니 갑자기 중고딩 때의 참고서가 생각난다. 밑줄을 그어가며 내용을 하나하나 빠뜨리지 않으려 애를 쓰고, 더 빨리 그 내용을 숙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참고서. 그리고 그것들은 학년이 올라가면 버려지는 것들이다.

 내게도 참고서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빨리 알기 위해서 밑줄 긋듯 성격과 취향을 외우고 많은 약속을 잡았던 사람들. 하지만 그들을 '외우면 외울수록' 점점 더 어려워졌다. 참고서처럼 지나면 버릴 수도 없는 사람들. 

 그렇다면 저 건너편에 있는 ‘친구’라는 사람에게 나는 무엇일까. 나에게 웃는 낯으로 다가와 편하게 말을 하고 나 또한 그렇게 대꾸하며 마주했던 저 사람이 갑자기 낯설다. 나는 그에게 외우고 버려야 하는 참고서였던가, 혹은 가볍고 쉬운 책이었던가. 휘리릭 넘겨보다가 손이 멈춘 자리에서 대충 책모서리를 접고 덮어버리는 쉬운 책이었던가. 아무런 중요한 내용도, 소중한 감동도 없는 어떤 페이지가 다시 펼쳐질 것 같다.

 생각해보니 내게도 그런 쉬운 책들이 많았다. 읽어도 읽은 것이 아닌, 다음에 읽을 생각도 없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제목조차 잊혀질.     





 펼쳐진 노트 양쪽 적당한 크기의 글씨로 채워진 한 장 분량의 글을 다 보고 난 후 생각보다 정신이 맑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워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어림잡아 2분도 넘게 남았는데도 그냥 벌떡 일어나버렸다! 바빴던 날들이 머릿속에 지나갔고, 지나가는 말로 '당했던' 쉬운 약속들과… 지나가는 말로 내가 '저지른' 쉬운 약속들이 기억나는 듯했다. 그 순간 묘하게도 대충 보다가 책장에 꽂아 넣은 어느 책이 생각났고, 어느 페이지에서 읽기를 멈추고 아무렇게나 접어버렸는지 알아보고 싶어졌다.

 벌떡 일어나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손가락으로 많지 않지 않은 책들을 훑었고, 손가락이 멈춘 곳에서 책을 꺼냈다. 그리고 책 모서리가가 접힌 곳을 펼쳐보았다.



 하지만 그림의 정밀함도 포의 방을 있는 그대로 되살리고 싶어 하는 에델 미라의 성에 차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농장 정원에 포가 묘사한 것과 똑같은 크기의 방을 짓기로 하고 자신의 대리인들(골동품 수집상과 가구 제작자, 목수)에게 에세이에 묘사된 품목들을 찾아 나서게 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단지 부분적으로만 얻는 성과는 아래와 같다.

- 깊숙한 벽감에 바닥까지 내려오는 큰 창문틀이 설치되어 있다.

- 창유리는 연지색이다.

- 자단목 창틀은 일반적인 것보다 더 두껍다

- 벽감 안쪽에는 창문 모양에 맞춘 아담한 은빛 니트 커튼이 느슨하게 걸려 있다.

.

.

.*


 

 펼친 페이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오다가 어느 문장 즈음에 책을 덮었는지 생각났다. 바로 그 문장 즈음에 또 한 번… 책을 덮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참 나랑은 맞지 않는 책인 것 같다. 내가 오늘을 포함해 두 번이나 읽기를 포기한 지점은 이 책의 고작 20페이지째였다. 

 아무튼, 나는 씻어야 했고, 손에 든 책을 책장에 꽂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들고 가야 할 가방에 넣었다. 세수하는 동안에도 나는 또 많은 이름과 얼굴들을 떠올려 냈고, 아무렇게나 책 모서리를 접어 기억의 깊은 책장으로 밀어 넣은 책들을 생각해 보았다. 오늘 예전의 누군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몇 년이나 지난 추억을 갑작스레 꺼내며 누군가에게 연락할만한 뻔뻔함은 내게는 없었으므로 곧 포기했다. 그리고 그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그리고 연락하면 반겨줄(그게 진심이든 아니든) 사람을 떠올리기로 했다. 연락할 사람 두세 명을 떠올려 놓았다. 그들이 나를 항상 기다리거나 반겨줄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일테고, 나는 그저 순서대로 연락해 점심 약속을 청해볼 생각이었다.


 집을 나서고, 차를 타고, 조심스레 몇 번이나 썼다 지워가며 한 친구에게 점심을 먹자는 첫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10초 뒤 너무나 쉽게 약속이 잡혀버렸다. 그 친구와 3개월 전이 마지막으로 접은 페이지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이따 천천히 읽어보아야겠다.










*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中, 로베르토 볼랴뇨 지음, 2009,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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