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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tenjohn Sep 06. 2016

혼밥의 탄생

노상 습득 노트 탐독기 3


 오전과 오후가 막 교차하려는 시간 즈음 올려다본 하늘은 끝없이 맑았고 또 맑았다. 친구는 오랜만의 연락을 너무나 평범하게 받아주었고, 또한 점심 약속 역시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너무나 쉽게 잡혀버렸다. 오히려 힘든 일은 그 이후에 약속 시간과 장소를 잡는 일이 아닌, 만나서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지를 정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저기 수십 미터 밖에서 친구가 손을 흔들며 잰걸음을 내게 오고 있었다. 고작 몇 분 늦었을 뿐인데 그렇게나 빨리 걸어오는 친구가 고마우면서 살짝 가슴이 찡했다. 살짝 숨을 몰아쉬며 내 앞에 선 친구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야, 우리 저기서 햄버거 하나 빨리 먹고 가자. 나 오후에 일 생겨서 좀 바빠.”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커다란 햄버거를 우적우적 씹었다. 그 시간동안 우리의 크게 바뀌지 않은 일상과, 우리의 기억의 교집합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적당히 나눴고, 마지막은 언제나처럼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약속으로 마무리했다.

 “언제 술 한잔 하자!”


 패스트푸드와 함께 했던 패스트런치. 기다리는 내내 무엇을 먹을까 고민했던 것은 부질없어졌지만, 식사가 너무도 빨리 끝난만큼 내겐 아직 다음 일정까지 남은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어떠랴, 내게는 남은 시간을 버텨낼 노트가 있었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친구의 뒷모습이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돌아서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급하게 먹어 더부룩했던 배가 살짝 편안해질 때까지 십 분 정도를 걷자 도착한 곳은 처음 노트를 주웠던 곳 근처 건물 2층에 있는 카페였다. 구석 창가의 작은 자리에 앉아 앞에 커피 한 잔을 두고 가방 속에 있던 노트를 꺼내 펼쳤다.



 며칠 전부터 약속을 하고, 다 와 간다는 전화를 하고, 미리 시켜놓고 있으라고 하며 심지어 고기를 미리 구워놓으라고까지 말했던, 그래서 노릇노릇 잘 익을 때쯤 도착해서 같이 시원한 소주 첫 잔을 함께 하겠다고 말했던 네가...결국 오지 않았던 날이 나는 아직도 생각난다. 그때 고기를 굽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너와 전화를 끊었을 때까지 내가 먹은 것은 풋고추 한입 정도였으니까 그때라도 난 주문한 고기를 무르고 나올 수 있었을까. 하지만 나는 전화를 끊고 물을 한 모금 마셨던가, 사방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나고, 나는 너도 모르게 고기를 불판에 얹어버렸다. 치이이이익.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맛있는 소리, 그리고 잠시 뒤에 코 앞에 퍼지는 그 고소한 냄새. 고기를 뒤집고, 반대쪽이 익어가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동안에도 나는 네가 꼭 올 줄만 알았지.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뭐야, 얘는 맨날 실없는 약속이나 당하고 바람이나 맞으며 사는 건가? 나는 읽던 페이지에 손가락을 끼우고 노트를 들어 앞뒤를 괜히 한 번 살펴보았다. 뭐 그런다고 이 노트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인지 보이진 않았다. 하긴 이렇게 두꺼운 노트를 손으로, 그것도 글자로 가득 채운 사람의 시간이 그렇게까지 빡빡할 리 없다. 그는 어쩌면 조금 여유롭게 사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만날 사람도, 그리고 할 일도 별로 없는 사람이거나, 할 일이 있어도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 암튼.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그 안내 멘트가 네 핸드폰의 배터리가 다 떨어진 것을 말하는 건지, 혹은 갑작스레 고장난 상황을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피치못할 사정으로 전원을 끈 건지 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해보려고 노력했다. 나중에 내가 식당을 나와서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을 때 넌 명랑한 목소리로 받았고, 나 정확한 사정은 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거의 모든 것을 다 알아차린채로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손이 처음엔 조금은 떨렸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왠지 네가 너무 밉지는 않았다. 그날 나는 잊고 살았던 자유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맛보았었거든. 신화 속에서 수많은 깨달음의 순간이나 신神을 접하는 순간에, 그리고 열반과 해탈에 길에 왜 그토록 불이 자주 등장하는지 그때 처음 이해할 '뻔' 했다. 고작 고기와 술을 앞에 두고 좀 너무 거창하고 웃기는 말인가? 하지만 난  진심인데.


 그날 내 전 재산은 그때 눈앞에 놓인 삼겹살 2인분과 소주 한 병의 값을 제외하고 5000원쯤이었던 것 같다. 말 그대로 전 재산이었지. 이틀 후엔 아르바이트 월급날이지만, 반은 제 날에 들어오고 반쯤은 하루 이틀씩 늦어졌기 때문에 나는 그 돈으로 며칠을 버텨야할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너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설렘으로 며칠 정도는 몇천 원쯤으로 버티기로 마음을 굳혀버렸다. 그리고 너는 오지 않고 주인에게 고기를 물러달라기도 이미 틀린 상황에서 나는 큰 결심을 해야만 했지. 주변의 테이블들은 모두 삼삼오오 함께 온 사람들로 들어찼고, 내 앞의 고기는 아무리 불을 작게 줄여도 어느새 육즙이 점점 말라갈 지경으로 구워졌지…난 잠시 망설이다가 곧 잔에 소주를 가득 따랐어. 어쩌면 너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나는 그 잔을 단숨에 들이켰고, 또 두 잔 째 소주를 가득 채웠어. 그리고는 어차피 이리된 거, 나는 집게와 가위를 손에 쥐어버렸지. 


 지금까지 살면서 다른 사람을 앞에 두지 않고 고기를 잘라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을 제외하고는 늘 사람이 있었지. 빈 속에 급하게 마신 술이 벌써 몸에 퍼졌는지 속이 찌르르하고… 나는 고기를 자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깨닫고 보니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던 거야. 그 고기 자르는 일에 말이지. 


 나는 그 순간 오로지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었어. 그동안은 늘 항상 내가 고기를 자를 때는 상대방을 의식했거든. 비계와 살점의 비율이 적당하게, 가지런이 예쁘게,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통속적인 한 점의 크기에 맞춰서. 하지만 이번엔 달랐어. 구워진 고기를 비계와 살코기로 분리해보기도 하고, 커다란 한 점을 쌈에 싸먹는 게 맛있을지 아니면 작은 두어 점을 싸먹는 게 맛있을지를 실험해보기로 했지. 어떤 것은 불판 가장자리로 옮겨서 좀 덜 익히고 어떤 것은 바짝 익혀도 보고. 살과 비계와 껍질이 물결처럼 굽이치는 두툼한 삼겹살을 나는 여러가지 방법을 잘라보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익혀봤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이 무얼까 고민해봤지. 사람들이 힐끔대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던 마음이 점점 사라지고, 마침내 서빙을 하는 종업원에게 자신감있는 목소리로 무 쌈을 추가할 깡도 생겼어김치도 줄기랑 잎사귀로 나눠서 구워보고 그 두 부분이 가장 맛있게 구워지는 시간을 알아냈지!  평소 상대 쪽에 가 있으면 잘 손이 닿지 않는 된장찌개나 계란찜 같은 사이드 메뉴를 내 앞에 마음대로 끌어다 먹고, 내 마음대로 그 테이블 안에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리고 한 점에 한 잔, 또 한 점에 한 잔….


 그러다 보니 벌써 소주 한 병을 금세 비웠더라. 평소에는 입에 고기가 들었는데도 사람들이 잔을 들면 엉겹결에 같이 들어서 마셨던 술도 가장 맛있을 순간에 마시고…. 천천히 고기를 씹어보면 그 순간순간마다  이齒에 그렇게 다양한 느낌이 날 줄이야. 고작 몇 센티 길이의 고기 한 점인데 어금니에 닿을 때마다 이게 살인지 비계인지 껍질인지, 씹히는 감촉이 어떻게 그렇게 다른지. 잘 구워진 껍질이 어금니의 압력을 버티다 쫄깃하게 터지는 느낌이란! 나는 어느새 요리 만화의 호들갑떠는 미식가들의 마음까지 이해하게 됐다니까.


 맞아, 사실 기분은 좀 더러웠고, 혼자 먹기 부끄럽기도 한데 아까워서 먹기 시작한 거야. 그곳에서 구워진 고기를 먹지 않고 값을 치르고 나왔더라면 따로 저녁을 챙겨 먹기에 좀 빠듯했을 거야. 내 그 돈을 내고도 넉넉하게 남을 돈이 있었다면 사람 눈치 많이 보는 나는 그냥 일어나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겠지. 부끄러워도 저녁은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고기를 먹기 시작한 다음부터 나는 되려 잊고 있었던 자유를 찾은 것 같았어. 몇 년간 어떤 음식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먹어보았을까. 어렸을 적 입에 바스러지진 알갱이를 하나하나 셀 정도로 혼자 정성껏 맛보았던 과자가 떠올랐어.


 그렇게 만끽한 오랜만의 자유가 나를 더 홀가분하게 만들었고, 나는 언제까지 버텨야 할지 모르는 나머지 예산으로 술을 한 병 더 시키고 말았지. 집에 라면이 두어 개 남았던가…한 2~3초간 생각해 보았지만. 그 생각도 접어두었어. 술도 잘 못마시는 주제에 객기를 부려서 마지막 두세 잔은 남겼던 것 같다. 그래도 정말로 오랜만에 기분 좋게 기분 좋게 마셨던 것 같아. 다행이 제법 취해서 사람들 눈치 같은 건 볼 겨를도 없었고 계산하고 나올 수 있었던 거 같아. 


 바람이 부는 시원한 길을 걸어 작은 방으로 돌아왔을 때, 너에게 전화가 왔고, 너는 뭔가 주저리주저리 변명 같은 걸 했던 거 같은데.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나는 그저 웃으며 ‘알겠어’하고 전화를 끊었던 거 같아.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마주쳤을 때 서로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어색하게 스쳐지나갔지.



 예전에 언젠가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경험을 했던 사람들끼리 서로 어떤 것들을 혼자 먹었는지에 대해 자조적으로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중에 수많은 사람이 매우 난이도가 높은 것으로 인정한 것이 바로 혼자서 고기 굽기였긴 하더라만.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혼자 삼겹살 먹은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쓴단 말인가! 정말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다시 한번 노트를 들어 의미없이 앞뒤로 살펴보았다. 약간의 세월이 묻어 모서리가 군데군데 닳은 노트. 하긴 요새는 혼밥이 대세라던데, 어쩌면 이 사람은 ‘혼밥’의 선구자였던 걸까. 뭐든. 



 난 그동안 무엇이 외로운 건지도 모르면서 계속 외로워했었어. 근데, 그날 이후 무엇이 정말 외로운 것인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어. 이미 혼자서도 하고 있던 것들, 영화 보기나 책 읽기 같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해보기도 하고사람들이랑 같이 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것들 서서히 혼자 해보기 시작했지. 그리고 좀 더 ‘하고 있는 것 자체'에 집중하게 됐고, 나는 나와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게 됐어. 무언가를 하는 동안에도 늘 외로웠는데, 내 스스로와 대화를 하지 않아서 생긴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외로움이 있다면 그게 진짜 외로움 아닐까?



 여기까지 읽고 점심에 후다닥 밀어 넣었던 햄버거 생각이 났다. 놀라운 점은 햄버거의 맛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노트를 덮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떻게 먹었는지, 어떤 맛이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오로지 짧은 시간동안 같이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메뉴였으니까. 콜라의 맛이 조금 떠오르는 듯 하기도 한데, 그게 아까 먹었던 콜라의 맛인지, 그동안 마셨던 많은 콜라의 맛들이 기억으로 뭉쳐있는 것인지는 통 모르겠다. 


 조심스레, 커피를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시간이 좀 남아서 들어온 이 카페, 반 밖에 남지 않은 커피맛을 이제 음미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조심스레 집중해서 마시면 정말로 어떤 다른 맛이 나는 걸까. 그냥 벌컥 마셔버리는 것보다는 나을까. 나는 스스로를 담백하다고 믿으면서 그런 것들을 기대하는 감정들을 SNS에서 사진을 올리며 요란을 떠는 허세스런 미식가들의 것으로 치부해왔다.


 계기契機,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참 중요하지. 그래도 사람들이 봤을 떄는 조금 웃기지 않았을까. 어떤 사람이 혼자 들어와 앉은 사람이 삼겹살 2인분과 소주를 엄청 집중해서 즐기는 모습이. 그래도 이 노트의 주인에게는 그것이 큰 계기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내게도 좀 더 즐겁게 살 수 있는 어떤 계기가 올까.


 창밖으로 이 노트를 처음 주웠던 그 길이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들… 한 여자가 무엇을 찾는 것처럼 유난히 그 근처를 두리번거리며 맴돈다. 무엇을 찾는 것일까… 이 햇빛 가득한 한가로운 오후에. 그래, 나는 어제 이맘때쯤 이 노트를 주웠었지. 그렇다면 저 여자는… 저 여자는… 어쩌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재빨리 노트를 가방에 넣으며 일어났다. 마음에 급해 ‘당기시오’라는 문구를 보지 못하고 문을 몇 번이나 밀다가 간신히 나와서는 계단을 우다다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창가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까지 갔으나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빼고 큰길을 훑어보았지만 사람들이 많아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사실 그 여자는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찾는 것이 있었더라도 이 노트가 아닌 다른 것일 수도 있겠지. 정말로 무엇을 애타게 찾는다면 나중에 종이라도 하나 써서 전봇대에 붙여놓겠지. 이제는 다음 일정까지 여유롭지 않은 시간이었으므로 나는 그 자리를 뜰 핑계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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