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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챠밍박 Mar 12. 2022

배를 긁다 퍼뜩

뛰어야 산다

 그는 얼마 전부터 잠자리에 누우면 이불속으로 손을 넣어 웃옷을 들춰 올린 후 양손으로 배를 벅벅 긁다 잠들곤 했다. 정확히는 배 중앙부가 아닌 양 갈비뼈 아래쪽 부분이었는데, 긁을 때마다 뱃가죽이 건조하게 퍼석거리는 게 묘한 불쾌감을 주었다. 이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 특정 질병의 전조인가 싶어 '배 가려움증', '배가 가려워요' 따위로 검색해보니, '행복한 맘', '줌마○' 같은 기혼 여성 커뮤니티의 글들이 쏟아졌다. 그녀들은 임신과 육아에 대한 고충을 나누며 임신 10주 차가 되니 배가 가려워요, 그럼 튼살 크림을 써보세요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40대 성인 남성이 배가 가렵다고 남긴 글은 찾을 수 없었다.   


 화장실에 가서 티셔츠를 들어 올리고 거울에 비친 뱃살을 바라보던 그는 방금 전까지 벅벅 긁어대던 부분거뭇한 갈색으로 얼룩져 있는 걸 발견했다. 그의 원래 살색은(적어도 뱃가죽만은) 뽀얀 우윳빛 아기 피부에 가까웠는데. 양손으로 뱃살을 쥐고 이리저리 들춰보니 가려운 부분의 피부 겉면이 건조하게 터 있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40대 성인 남성인 그는, 생명을 잉태한 숭고한 여성들이 겪는 뱃살 터짐 비스무레한 증상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그의 뱃속엔 생명은커녕 소화된 음식물 덩어리만 가득했을 것이므로 이 사태는 숭고함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는 골반을 앞뒤 좌우로 틀어보며 푸짐하게 접히는 뱃살을 만지다 긁다, 만지다 긁다를 반복하다 잠시 자괴감에 휩싸였다.  


 사실 그는 년 봄부터 가을까지, 무려 16kg 정도를 감량했다. 그렇다고 몸짱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의 수준은 결코 아니었고, 그저 몸이 한결 보기 좋아지고 가벼워진 정도였다. 그의 몸이 완벽히 태워버리지 못한 살들이 여기저기 남아있긴 했으나, 옷을 입으면 남들로서는 알아차리기 힘든 수준이었다. 체중이 키에 걸맞은 권장 체중에 가까워짐과 동시에 혈압이 정상 수준으로 돌아오며 대사 증후군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는 듯 보였지만, 어느 가을날 그는 중대한 패착을 두고 말았다. 날씨가 추워졌다는 이유로 이틀에 한 번 꼴로 하던 10km 달리기를 어영부영 그만둬 버린 것이다. 달리기는 분명 즐거운 일이었으나,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넷플릭스를 보며 술과 안주를 먹고 마시는 일도 넉넉한 만족감을 주었으므로. 훌륭하게 감량에 성공했다는 충만감이 안도감으로, 나태함으로 변하는 일은 너무나 쉽고 자연스러웠다. 치즈와 베이컨이 잔뜩 올라간 라지 사이즈 피자라던지, 달달하고 매콤한 양념에 절여진 치킨 같은 것들을 양껏 먹으며 그깟 살 달리기 며칠 하면 빠진다고 호언을 했다.


 그렇게 호기를 부리더니 이 꼴이 났구나, 나는 임산부도 아닌데 배에 튼살 크림을 발라야 해, 고 그는 잠시 반성했다. 화장실에서 나와 거실장 아래에 처박혀 있던 체중계를 끄집어 내자 밟고 올라설 수 없을 정도로 뿌옇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불과 몇 달 전 까지도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갔던 곳인데. 체중을 측정하고 기록하고 달리길 반복했는데. 그는 물티슈에 묻어 나오는 시꺼먼 먼지를 보며 체중계도 자신의 몸도 몹시 방치되어 있었구나 생각했다. 몸무게는 91kg에 도달해 있었다. 120일 동안 11kg의 증량. 그러니까 한 달에 3킬로 가까이 그는 부지런히 살을 찌워온 것이다. 그간 샤워를 할 때마다 거울에 비친, 조금씩 본연의 두툼함을 찾아가는 바디 라인을 알아차려 왔음에도 그는 애써 눈길을 두지 않았다. 금세 다시 친해진 기름진 음식과의 관계를, 포만감이 주는 나른한 기분을 단칼에 끊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90kg을 넘어선 육중한 현실과 마주하자, 이대로 있을 순 없다고 정신이 번쩍, 까지는 아니고 살짝, 아주 살짝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는 두터운 겨울 추리닝을 챙겨 입고 집 앞 천변에 섰다. 작년, 홍제천과 한강 오가며 달리던 기억과 기분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달리기를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 달리기는 고통보다 쾌감을 주었고, 덕분에 특별한 괴로움 없이, 그저 즐겁게 달리다 보니 만족스러운 감량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달릴수록 몸은 하루가 다르게 가벼워졌고, 몸도 마음도 활력을 얻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옛이야기가 되어버릴 줄이야.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달리기 앱을 구동시켰다.   


 3분 뛰고 2분 걷길 반복하는 구성으로 채워진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작년 한때 쉬지 않고 80분을 달린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그래선 안 된다는 걸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오버 페이스는 부상의 지름길이었다. 그는 부상 없이 오래 달리는 게 가장 중요하단 걸 알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반년만에 첫발을 내디뎠다. 어딘가 어색하고 생경하게 느껴졌다. 달리는 그의 몸짓과 착지법 같은 것들이. 그는 그 이질감을 떨쳐내려 작년에 나의 다이어트는 행복했어, 달리면서 즐거웠잖아, 나는 또 해낼 거야, 그때의 기쁨과 희열을 생각하자, 하고 속으로 외쳐 보았다.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자, 그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아아, 이젠 쉬지 않고 5분을 뛰기도 버거운 몸뚱이로 회기 했구나, 하는 비통한 감정을 느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온몸의 살들이 중력을 따라 무겁게 출렁였고, 그 배가된 중력이 파도처럼 넘실대는 살들의 관성과 결합해 온 몸의 뼈와 관절로 전달되었다. 삐걱삐걱, 노쇠하고 살찐 로보트가 된 기분이었다. 요추와 무릎, 정강이 뼈로 전해지는 무게감과 파동이 그의 몸과 마음을 짓눌렀다.  


 후후하하, 후후하하- 이제부터 다시 달리는 거야. 되찾는 거야, 작년에 느낀 성취감과 고양.

 후후하하, 후후하하- 근육을 키워야 요요가 덜 오겠지. 나는 이제 중량 운동도 해야 해.

 후후하하, 후후하하- 그래도 앞에서 뛰어오는 아저씨보단 내가 좀 더 날씬한걸, 후후... 하하...


 그는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육감적인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대단한 육체미 같은 것을 원하는 건 아니라고, 그저 적당히 태가 나는 몸으로 하이 컨디션을 유지하고 싶다고, 일단은 그걸 목표로 두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참에 달리기와 감량의 과정을 기록해 보기로 했다. 그건 이제부터 달리기를 시도해 보려는 왕초보 러너들과 감량에 힘겨워하는 비만인들에게 작은 도움이나 공감을 줄 수도 있을 거라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의지를 다잡으며 지속적으로 달릴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그는 앞으로 적어도 이틀에 한 번 60분 이상을 달리려고 한다. 컨디션이 올라오면 횟수와 시간을 늘려 나갈 것이고, 가능하다면 10km 마라톤에도 나가려고 한다. 올해는 코로나로 중단됐던 마라톤 대회들이 하나 둘 재개될 거란 기대를 가지며.


 집에 돌아온 그는 샤워를 마치고 갈변한 뱃살에 수분크림을 잔뜩 발랐다. 한 번의 달리기로 변한 건 없었지만 그는 분명 첫 출발선을 갈랐다. 밤이 되고 소파에 앉아 스마트 체중계를 검색해 주문했다. 어플과 연동해 정확한 몸무게와 체성분을 기록하고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의지를 다잡는 효과도 있으리라. 그 의지를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그는 이곳에 자신의 적나라한 체성분을 공개하기로 했다. 그에게 응원과 박수를 보낸다. 넌 다시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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