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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on Oct 30. 2017

나는 헬조선을 욕할 자격이 없다

이번 학기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전세로 8천, 방 상태가 성에 차지 않아 60만 원을 주고 도배·장판을 새로 했다. 그 김에 가구도 바꿨다. 책상, 책장, 밥솥…, 사야할 것도 많았다. 이사 후 몇 주 동안은 택배 박스만 뜯었다. 한 번씩 집에 오는 지인들이 넓은 곳에서 잘해놓고 산다고 은근히 부러워하는 눈치다. 얼마 전에는 영상을 만들 일이 생겼는데 컴퓨터가 없어 엄마에게 말했다. 저렴하게 구입하기 위해 조립컴퓨터를 주문했다. 220만 원이 나왔다. 


구차하지만 궁상맞지는 않아도 되는 ㅡ 나의 집은 어디인가

사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LH청년전세임대’로 얻었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수도권 기준 8천만 원까지 전세금을 대출해주는 제도로 나는 매달 대출금의 이자만 내면 되는 LH의 주거복지사업이다.1) 이자는 8천만 원 기준 월 13만 5천 원이고 여기에 각종 ‘세’를 합해도 월 20만 원이면 충분하다. 옥탑방에 사는 친구는 월세로만 40만 원을 내지만 나는 그래도 부담이 돼서 지금 살고 있는 방을 계약한 후에도 연락이 오면 다른 방들을 보러 다녔다.


5천만 원대 방들은 말이 안됐다. 차라리 고시원이 나을 법 했다. 6천만 원대 방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괜찮은 건 아니었다. 한 곳은 반지하도 아니고 그냥 지층이었는데 나는 지층이 지상층의 준말인 줄로만 알았다.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엄청난 습기에 당황했다. 화장실은 혼자만 높은 곳에 있었다. 눈을 부릅떠야 하는 일상에, 어쩌다 하루 술에 취해 볼일을 보다 비틀거리면 머리가 깨져도 이상할 것 없는 구조의 방이었다. 방은 2개였지만 벽면 곳곳이 거뭇거뭇했다. 새로 했다는 부엌은 먼지가 엄청난 환풍기 바로 밑에 있었다.2) 방을 보기 전까진 중개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한껏 밝은 표정으로 동네에서 정감이 느껴진다느니, 방이 두 개라 기대된다느니 하며 호들갑을 떨었는데 돌아갈 땐 삐친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무슨 사이라고 중개인한테 배신감마저 느꼈다. 그래도 정신 차렸다. 다른 방이 나오면 연락 달라고 부탁했다. 7천부터는 살만한 방들이 나왔고 8천까지 생각하니 지금 살고 있는 방이 보였다.


방을 구하는데 왜 중개인의 연락을 기다리는지, 고객인 내가 왜 중개인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 먼저 설명해야 했던 건데, LH는 무작정 찾아가봐야 고생만 한다. 집주인들은 대부분 중간과정이 복잡하고 돈도 늦게 입금되는 LH를 꺼린다. 학생은 나 말고도 많거니와 전세 자체를 꺼린다. 중개인들은 하나같이 학생들이 눈을 낮춰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해도 내가 계약한 방처럼 값을 주변 시세보다 비싸게 부른다. 나도 엄연히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니 숙이고 싶지 않았는데, 역시 그럴 수는 없었다. 물론 좋은 중개사도 있었다. 말년 휴가를 나와 서울까지 방을 구하러 온 나를 딱하게 여겼다. 자기 탓은 아니지만 방이 없던 게 미안했는지 친하게 지내는 집주인에게 부탁해본다고 했다. 미안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어서 진심으로 감사했고, 감사하는 내가 불쌍했다. 하지만 좋은 인연은 언제나 오래가지 못한다. 계약을 해도 3주 뒤에나 입주할 수 있는 탓에 7월 중순에 전역한 나는 당장 방을 구해야 했다. 그래야 전역 후에 조금이라도 아르바이트를 할 시간이 났다. 사실 이런 취급을 받을 바에 속 편히 기숙사에 들어갈까 생각도 했다. 좋은 제도지만 워낙 애로사항이 많다.3) 하지만 기숙사나 LH나 들어가는 비용은 비슷했고 2년 동안은 수고로움없이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참았다. 게다가 난 하루 만에 방을 찾았으니 운이 좋은 편이다.


구차하지만 궁상맞지는 않은 ㅡ 전액 장학생

그래서 주거 부담이 다른 친구들보단 훨씬 덜하지만 그렇다고 생활이 넉넉치는 않다. 하루 8시간, 주 2일. 유니클로 알바를 해서 내가 벌 수 있는 돈은 40. 월세를 빼면 20이 남는다.4) 그 탓에 매일 눈이 노곤하고, 언젠가 며칠 밤새는 것으로는 입 안에 물집도 생기지 않게 됐다. 식욕이 떨어지는 건 다행이다. 욕심을 버리면 되겠지만 그럼 나에게 무엇이 남을까. 나도 독립하고 싶지만 용돈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나는 첫 학기를 제외하곤 항상 전액장학생이었다. 물론 한국장학재단이 덕이다. 200만 원 정도의 국가장학금과 학교에서 주는 우정장학이나 성적장학을 합치면 매학기 등록금이 해결된다. 아빤 내가 전액 장학생이라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닌다. 좋아할 일은 아닌데, 그것 말고 좋은 일이 뭐 있겠나 싶어 아무 말 않았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학교를 다녔다. 언제나 무엇인지 모를 부채의식을 느꼈고 혹 우정장학에 떨어질 일에 대비해야 했다. 


복학할 때가 되면 사정이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했는데 엄마는 얼마 전 파산신청을 했다.5) 하필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있을 때, 엄마는 대구까지 가서 성실히 돈을 갚겠노라는 선서를 해야 했다. 가끔 인터넷에서 파산신청을 비난하는 글들이 보일 때면 얼른 창을 닫는다. 아빠도 오래 전부터 엄마 명의로 휴대폰을 써왔다. 입대 전에는 2분위였던 소득분위가 1분위로 떨어져 있었다.6) 종종 형편에 비해 소득분위가 높게 산정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 다행이다. 그러니 구구절절하려면 얼마든지 구구절절할 수 있는 가정사가 내게도 있다. 그래서 가끔  혼자 무너진다. 어젠 무너지기 전에 정신을 차리려 침대에 누워 도재명의 음악을 틀었고, 정영문의 소설을 폈다. 땅을 맴도는 소리와 일상적 허무가 나에겐 힘이 된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아무 생각 없이 한 페이지를 찍어 인스타에 올렸다. 새벽 3시였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술 마셔야지.’ 우리는 자주 보진 못하지만 서로 잘 지내냐고 묻지 않는다. 그래서 어제 하루는 수업에 가지 않았다. 너무 개운했다. 중학생 때 아무 이유 없이 학교를 가지 않은 이후 처음이었으니 10여 년만이다. 언제 한 번 친구를 따라 클럽에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형은 마침 연락하려 했다며 자기 집에서 책과 스피커를 가져가라고 했다. 그래서 엄마가 보내준 사과즙 한 박스를 챙겨 한남동으로 갔다. 저녁으로 족발을 샀다. 고작 3만 4천 원짜리 보답. 술은 시키지 않았다. 지갑을 4일 이상 꺼내지 않을 순 없다. 조금이라도 가볍고 싶어 가벼운 관계를 모두 정리한 나에게도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는 보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사실 컴퓨터도 시에서 주관하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샀다. 부모님이 고향 토박이니 거주기간도 만점, 재산세 역시 미과세자 증명서를 냈으니 만점, 학점도 거의 만점에 가까웠으니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형편의 친구들만 어떻게 밀치면 됐다. 혹여나 내가 떨어질까 두렵다. 만약 떨어지면, 모르겠다. 엄마가 곤란해지겠지. 평소에 잘 웃지도 않는 엄마가 억지로 서근한 인상을 만들고 지인들에게 이해를 구하겠지. 엄마를 따라 다니며 아파트 파는 일을 도울 때 나는 엄마가 그렇게 낯간지러운 사람이 된 줄은 몰랐다. 겨우 이십여 년을 산 나조차 이제는 생각이 굳어 가는데.


장학금을 받게 되도 내가 산 컴퓨터는 사치다. 계속 작업이 들어올 일도 없고, 들어오더라도 조금 답답하게 작업해도 됐으니. 하지만 정말 우습게도 나는 나를 믿는다. 아니, 믿어보기로 했다. 취업 준비는 하지 않기로 했다. 발판이 될 만한 직장이 있다면 생각해보겠지만 이미 영상 쪽으로 굳혔다. 남들처럼 공무원 준비를 하거나 스펙을 쌓아야 마땅하건만 무모하게 살기로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고 어떻게도 되지 못하면 그땐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 어차피 쓸데없는 삶. 희망 고문도 아니고 나에게는 운 좋게 기회를 잡은 친구(그렇다고 헬조선에서 해방된 건 아니지만)가 있다. 공인된 가난으로 제도적 혜택을 받는 삶에 익숙해진 덕도 클 것이다. 그것이 좀 오래 이어졌다고, 그래서 내 것이 아닌 것들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나는 주제파악을 못하고 몽롱하게 산다. 


그렇기에 나는 헬조선을 욕할 자격이 없다. ‘헬’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고, 내 처지를 역설적으로 강조하려는 표현도 아니다. 나는 헬조선 덕에 그나마의 자존심을 지키며 살았으니. 나는 정말 그저 자격이 없을 뿐이다. LH청년전세임대는 대학생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다. 자퇴하고 음악을 하는 내 친구는 서울에서 쫓겨나 동두천에 있는 지인의 집에서 생활하다가 결국 입대했다. 친구는 잠시 동안 월 200만 원 정도가 들어오는 일을 하면서 느꼈던 편안함이 두려웠다고 했다. 시 장학금을 받게 된다고 해도 기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도 누군가를 위해 내려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등록금을 해결하지 못한 친구들도 있을 텐데, 나는 나를 위한 투자에까지 욕심 부리고 있으니. 그들의 몫을 빼앗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이 불편하지만 구차한 나는 손을 더욱 꽉 쥔다. 어쨌든 나처럼 사는 청년들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헬조선에 불평도, 감사도 할 수 없는 나와 같은 청년들은 아무런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감이 마땅하다. 말해봐야 헬조선 담론의 무마를 위한 노력에 일조하는 것만 될 뿐.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내가 모든 청년을 대변할 수 없듯 모든 청년이 헬조선을 욕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가지진 못했다는 사실. 또, 누구보다 현실적이어야 하지만 무모하게 살아가려 하는 청년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편하게 산다. 많은 청년들이 이미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이 글은 쉽게 쓰여졌다. 내가 어떤 위로나 응원을 보낼 자격이 없듯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각자의 삶에 온전히 충실하기도 부족한 세상7) 속에서, 어떻게든 그저 자기 한 몸이라도 잘 지켰으면 한다. 죽기 직전까지는 살자.8) 너도, 나도.


1) 이데일리, "LH 청년전세임대, 부모 연봉 3억원 청년도 입주", 2017.10.13.

부당 수급은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박탈감을 더욱 심화시키며 제도를 

홍보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보여준다.

http://www.edaily.co.kr/news/news_detail.asp?newsId=02305846616092592&mediaCodeNo=257&OutLnkChk=Y


2) 경향신문, “서울 1인 청년가구 37%는 ‘지·옥·고’에 산다”, 2017. 10.10.

헬조선에서 생활고는 세대의 분별이 없다.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710101108001&code=920202#csidx88620c1bab21faaaadcc166652530a7 

  동아일보, “반지하·옥탑방·고시원은 이 시대 가장 슬픈 건물”, 2017년 11월 호                                   

http://shindonga.donga.com/3/all/13/1107048/2


3) ifsPOST, “하늘의 방따기, LH청년전세임대주택”, 2017.07.17.

   (해당 기사에서는 계약률을 28%라고 했지만 다른 기사에서는 3년 동안의 계약률 평균치가 68%라고 하고 있다.)

http://www.ifs.or.kr/bbs/board.php?bo_table=YTT_board&wr_id=194


4) 스포츠경향, “19살 정유라 용돈 월 650만원 VS 대학생 한 달 용돈 평균 69만원”, 2017.07.12.

http://sports.khan.co.kr/bizlife/sk_index.html?art_id=201707121757003&sec_id=560901&pt=nv

   이데일리, “주거비 부담에 '헉헉'…30~40대 소비도 급감했다”, 2017.10.29.

http://www.edaily.co.kr/news/news_detail.asp?newsId=01531766616097840&mediaCodeNo=257&OutLnkChk=Y

   이데일리, “[벼랑 끝 70대]③혼자 사는 70대 노인, 20·30대보다 더 많다”, 2017.09.05

http://www.edaily.co.kr/news/news_detail.asp?newsId=01298886616057168&mediaCodeNo=257&OutLnkChk=Y

최근 무슨 유행처럼 다뤄지고 있는 ‘혼족’ 현상은 인간 소외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5) INSIDE, “피케티 지수로 본 가계부채대책] 세계 최고 수준 ‘불평등 사회’ 바꿀 수 있을까”, 2017.10.28

http://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25154


6) 조선일보, “'개천의 용' 사라지고 '금수저론' 현실로"…계층이동 13년새 절반으로 감소”, 2017.09.25.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25/2017092501141.html


7) 동아일보, “인간관계 피로감 ‘관태기’에 빠진 청년들”, 2017.04.04 
http://news.donga.com/3/all/20170404/83675088/1#csidx76031b88192a92eb70120fe280df72d


8) 한국일보, “10대 자살률만 상승 왜? “공부해도 미래 안 보여”“, 2017.09.26
http://www.hankookilbo.com/v/952e1d3271c548e483eac8f6143234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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